영화

영화 리스타트(RE-START, 2019)

로이는 똑같은 아침을 139번째 맞이하고 있다. 아침 7시만 되면 집에 쳐들어온 킬러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온갖 수를 쓴다. 칼을 들고 설치는 킬러부터 시작해서 헬기를 타고 창문 바로 앞에서 기관총을 쏴대는 킬러도 있다. 그런가 하면 차를 몰고 쫓아오는 두 명의 여자 킬러와 덩치 좋은 쌍둥이, 폭탄 전문가 등 로이가 가는 곳마다 어떻게 알고 따라와 죽이려고 든다. 매일 아침 킬러들의 똑같은 수법을 100번 넘게 당하다 보니 이제는 한발 앞서 그들을 처리할 수 있게 되지만 12시 47분이 되면 어떻게든 죽고 다시 똑같은 하루를 맞이한다.

이렇게 가다가는 영원히 이 하루를 벗어나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든 로이는 타임 루프에 갇히기 바로 전날 전 부인 젬마의 연구소에 찾아갔던 기억을 떠올리며 하나씩 하나씩 해결의 실마리를 풀어간다.

로이는 그야말로 죽어야 사는 남자였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타임 루프에 갇혔기 때문에 벗어날 수 있는 방법 또한 알지 못한다. 더군다나 아침 7시와 낮 12시 47분이라는 고작 몇 시간을 백몇 번씩 반복하고 있으니 뭘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그저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킬러를 죽이고 또 죽이는 기술만 늘어날 뿐이었다.
영화 초반에는 로이의 상황이 어떤지 소개하고 있었기 때문에 액션이 끝내줬다. 로이는 무시무시한 칼을 휘두르는 킬러를 요리조리 피하며 커피도 마시는 등 너무나 여유로웠다. 패턴이 바뀌지 않았기에 킬러를 다른 킬러로 방패 삼아 난사하는 총알을 피할 수도 있었고, 어차피 죽어서 다시 돌아올 테니 스포츠카를 훔쳐서 도로를 신나게 달리기도 했다. 역동적인 액션이 초반의 시선을 잡아두었기에 정말 신이 났다. 액션이 진짜 좋아서 4DX로도 상영했다면 더 즐거웠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액션으로 흥미를 끈 이후에 전 부인 젬마를 찾아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데, 이 부분이 굉장히 지루했다. 그래서인지 중간중간 졸고 말았는데, 연구실에서 일하는 젬마와 나누던 대화가 하필이면 로이의 반복되는 하루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걸 중반 이후에 인지하게 됐다. 왠지 중요한 것 같은 “오시리스의 스핀들”이 언급되어 뭔가 싶어 당황했지만, 다행히도 오가는 대화를 통해 대충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래도 중요한 걸 놓치니 마지막까지 영 찜찜하긴 했다.

로이가 젬마와의 대화를 통해 이 시간에 갇힌 이유를 대충 알게 되긴 했지만 그럼에도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러다 자꾸만 반복되어 200회가 넘어가다 보니 마치 게임의 엔딩을 맞이하듯 미처 몰랐던 새로운 설정이 그를 덮쳤다.
그 과정까지 겪고 나자 로이는 자신에게 중요한 게 뭔지 그제서야 깨닫게 됐다. 여기서부터는 영화의 톤이 상당히 달라졌다. 내가 별로 안 좋아하는 분위기로 바뀌어서 당황스러웠다. 한국 영화도 아니고 액션 영화에서 굳이 그런 전개로 이끌어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안 그러면 총 쏘고 추격전을 벌인 것 외에 내용이 너무 없어서 그랬나 싶기도 하다.

아무튼 그렇게 흘러가다가 어찌저찌 해결 방법을 찾고 다시 액션 장르로 돌아와 다양하게 싸우며 반복되는 하루를 보여줬다. 그런데 또다시 당황스럽게도 결말의 끝맺음이 확실하지 않았다. 다양한 해석이 나오도록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도 아니고 액션 영화인데 결말을 흐지부지 끝내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영화를 보고 난 뒤 감독이 <나쁜 녀석들: 포에버>의 각본을 썼다는 걸 알게 되자, 이 영화의 결말이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뒷심이 좀 많이 부족한 감독인 것 같다.

마블 시리즈에서 크로스 본즈로 캡틴의 뒤통수를 친 프랭크 그릴로가 역할을 잘 소화한 덕분에 그나마 나쁘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상남자 스타일의 캐릭터 자체가 매력적이었다. 멋진 액션을 보여줬고 때론 웃기기도 했는데, 프랭크 그릴로와 깊은 관련이 있는 영화의 명대사 장면이 제일 웃겼다.
악당 역할의 멜 깁슨은 최근엔 연출을 더 많이 해서 그런가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오미 왓츠도 반가웠고, 양자경은 분량이 많지 않고 그리 인상적인 캐릭터도 아니라서 왜 출연한 건지 좀 의문이다.

타임 루프는 이제 영화 소재로 빈번하게 사용되어 신선하진 않지만, 그래도 아이디어가 좋다면 재미있게 활용할 수 있는 것 같다. 이 영화 역시 초반엔 시원시원한 액션이 주를 이뤄서 흥미진진했으니 말이다.
그래도 누가 묻는다면 굳이 극장에서 안 봐도 된다고 말할 것 같은 영화다.


영화 미나리(Minari, 2020)

 

 

한국인 이민자 가족인 제이콥과 모니카, 그리고 두 아이 앤, 데이빗은 캘리포니아에서 살다가 이제 막 아칸소로 이사를 왔다. 더 나은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이사를 온 게 아닌, 제이콥이 가족을 위해 무언가를 해보고자 낯선 땅에 온 것이었다. 모니카는 그 어떤 말도 듣지 못했는지 가족이 살 집이라고 트레일러를 보여주는 제이콥의 말에 답답함부터 느낀다. 제이콥은 잘 살 수 있을 거라며, 농장을 만들어 자신들과 같은 한국 이민자들을 위한 채소, 과일을 심어 팔 거라고 자신 있게 말했지만, 그녀는 못마땅하기만 하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드넓은 땅 한가운데에서 가족들은 생활을 시작했다.

모니카는 병아리 감별소에 나가 일을 하기 시작했고, 제이콥은 농장을 새로 가꾸기 시작하며 틈이 날 때 아내를 따라가서 일을 했다. 모니카는 아무도 없는 곳에 둘만 남아있을 아이들이 걱정됐는데, 다행히 한국에 사는 엄마가 와서 함께 살면서 부부가 일을 나갔을 때 아이들을 봐주기로 했다. 모니카는 오랜만에 만난 엄마를 반가워하며, 또 미국에서 구할 수 없는 것들을 바리바리 싸온 마음에 감사해한다. 그리고 아이들은 한국에서 온 할머니와의 생활이 영 낯설기만 하다.

 

 

보통은 여건이 된다면 지금보다 더 나은 생활을 위해 이사를 하곤 하지만, 제이콥의 가족은 돈을 많이 벌기 위해 아칸소로 온 게 아니었다. 제이콥과 모니카의 대화를 통해 알 수 있었던 건 캘리포니아에 있을 때 그들은 좁은 집에 살긴 했어도 경제적인 면에서는 지금보다 나았다는 것이다. 비록 병아리 감별을 하며 돈을 번 것이었어도 말이다.
그런데 제이콥은 그렇게 희망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내기보다는 무언가를 제 손으로 만들고 일궈내고 싶었다. 그래서 홀로 모든 것을 계획해 이사를 단행한 것이었을 테고, 아내에겐 그저 믿고 따라오라는 말만 하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자신감 넘치던 제이콥과는 달리 모니카는 막막하기만 했다. 트레일러에서 사는 게 어떤 건지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집 터를 잡은 곳은 너무나 외진 곳에 있다는 게 문제였다. 아들 데이빗의 심장이 좋지 않아서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겼을 경우를 대비해 병원이 가까운 도시에 살기를 바랐다.
자연재해 같은 일이 문득 일어날 때마다 부부는 서로 대립을 하며 목소리를 높이곤 했지만, 앤과 데이빗은 이곳에서 사는 걸 그리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데이빗의 심장이 안 좋아서 뛰진 못해도 들판과 나무, 그리고 근처의 개울 같은 곳이 있어서 놀기에는 괜찮았다.

네 가족의 생활이 어떻게든 시작되었는데, 부부 모두 일을 해야만 하는 입장에서 아이들을 돌봐줄 수 있는 베이비시터가 있어야만 했으나 여의치 않아서 할머니 순자가 미국으로 와 함께 살게 됐다. 순자의 딸 모니카는 오랜만에 만난 엄마가 반갑고 또 고마워서 눈물부터 났다. 엄마란 자식을 낳았을 때 더욱 애틋해지고 고맙고 미안해지는 존재인 것 같다. 또한 엄마는 자식이 아무리 나이가 들었어도 마냥 어린아이처럼 여기는 듯하다. 그래서 조금 울컥해졌었다.
한국에 가본 적이 없는 아이들은 할머니의 존재 자체를 낯설어 했다. 보통의 미국 할머니들과는 다를 수밖에 없는 한국 할머니였기에 어색했고 때론 이상하게만 보였다. 아이들, 특히 데이빗과 순자가 함께 하는 장면에서는 여지없이 웃음이 터졌다. 순자가 아이들과 화투를 치며 감탄사처럼 욕설을 했던 장면, 데이빗이 한약 때문에 할머니에게 몹쓸 장난을 친 장면 등이 인상적이었다. 아이들이 자신을 탐탁지 않아 하는 걸 다 알면서도 순자는 모르는 척 아이들을 챙기며 살가운 모습을 보였다. 제 딸의 아이들이라 예쁘지 않을 리가 없었으니 말이다.

 

 

순자가 함께 살게 되면서 가족의 생활이 안정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내 여러 문제가 발생했다. 믿는 구석이 있어서 의기양양하던 제이콥은 앞길이 막막해졌고, 농사에 관련된 문제가 집에까지 이어져 모니카와 대립하는 바람에 두 사람의 관계는 터지기 일보 직전의 상태가 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던 순자에게도 큰일이 생겼고, 영화 후반엔 가족 모두 망연자실할 사건도 일어났다.

기회의 땅, 아메리칸드림이라고 말할 정도로 미국은 세계 곳곳의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삶을 위해 찾는 나라다. 이민자라 불리는 사람들이 뿌리내린 삶의 터전을 버리고 미국으로 왔을 땐 희망만이 가득했을 것이다. 고국에서는 더 이상 살 수가 없어서, 앞길이 막막하기만 해서 다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거라는 꿈을 품고 왔다. 하지만 낯선 언어를 사용하는 낯선 나라에서의 삶은 고국에서의 삶보다 더 치열했고 힘겨웠을 게 당연했다. 기회의 땅은 자국민들이 우선이었을 테고, 그러다 보면 이민자들이 설 수 있는 자리는 한정적이었을 텐데 그 자리를 놓고 다른 이민자들과 하는 경쟁은 더 고된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가족이라는 소중한 존재가 그들의 뒤에 있기에 어떻게든 버티고 이겨서 하나의 자리라도 차지하기 위해 애를 썼다. 제이콥이 농장을 만들겠다고 무모하게 도전한 것 역시 가족 때문이었다. 혼자 살았다면 무슨 일을 하든, 먹고 잘 곳 따위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가족을 위해 새로운 도전을 하게 됐는데 안타깝게도 그런 마음과는 관계없이 사람 일이 뜻대로 되는 게 아니었기에 더 내려갈 곳이 없을 것만 같은 이곳에서 자꾸만 희망보다는 절망을 맛보게 됐다. 그래서 사랑하는 아내와도 의견이 맞지 않아 사이가 틀어져 최악의 경우까지 생각해야 했던 상황이 오기도 했다. 나아지는 것처럼 보여도 심적으로는 버틸 수가 없었던 모니카가 이해가 됐다.
그렇게 가족이 흩어지는가 싶었지만 역시 가족은 가족이었다. 무슨 일이 생겼을 때 가족은 자신보다 상대방을 먼저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자식의 손을 덜어주기 위해 애를 쓴 순자, 아내와 아이들에게 나오지 말라고 소리를 쳤던 제이콥, 남편을 돕기 위해 뛰쳐나갔던 모니카는 물론이고 동생에게 차에 있으라고 당부하던 앤과 별로 안 좋아했던 할머니에게 우리집으로 돌아가자고 말했던 데이빗 모두 가족이었기에 서로를 먼저 챙기고 보듬어줬다. 결말의 장면이 그래서 뭉클하게 마음을 울렸다.

앞으로 제이콥의 가족에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습기가 가득한 외진 곳에서 무럭무럭 자라는 미나리처럼 미국이든 어디든 뿌리를 내리고 굳세게 살아갈 수 있을 거라 느껴졌다. 가족이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제36회 선댄스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했을 때 관심이 생겼었고, 작년 10월에 메인 예고편을 보고 난 뒤에는 기대감이 절로 생겼다. 이후엔 윤여정 배우님의 수많은 여우조연상 쾌거에 얼른 영화가 보고 싶었는데 개봉 날짜가 잡히지 않아 애가 탔었다. 그래서 개봉하자마자 극장에 가서 보고 왔다.

미국에 정착한 한국 이민자들의 이야기를 미국적이면서도 한국적으로 풀어냈다. 80년대를 배경으로 열악한 환경에서 꿋꿋이 살아가는 가족의 이야기를 잘 담아냈다. 공감이 되지 않을 상황에 있는 한 가족의 이야기였지만 서로 오가는 감정엔 너무나 공감이 됐다. 감성적인 영화를 좋아하는 내게 너무나 좋았던 작품이었다.
데이빗과 순자가 함께 등장할 때마다 코믹한 부분이 있어서 여러 번 웃기도 했다. 그리고 후반엔 여지없이 눈물이 터져서 영화 끝날 때까지 우느라 가슴이 먹먹하면서도 벅차올랐다. 담백한 결말까지 정말 좋았다.

영화를 이끌어갔다고 할 수 있는 스티븐 연 배우의 한국어 실력이 많이 늘어서 자연스러웠다. 감정 연기 또한 좋았다. 한예리 배우는 워낙 매력적이라 호감이었는데 이 영화 덕분에 못 본 작품들을 찾아보고 싶어졌다. 앨런 김과 노엘 케이트 조는 진짜 자식들처럼 연기를 잘 해줘서 인상적이었는데, 어른스러운 앤과 장난기 많은 막내 데이빗의 캐릭터가 달랐기에 더 좋았다. 그리고 윤여정 배우님은 처음엔 보통의 할머니와 다를 바 없고 연기 또한 언제나 보여주던 모습이라 왜 그렇게 상을 많이 받으신 건가 좀 의아했다. 그러다 중반 이후 상황이 바뀌면서 많은 상을 받으신 이유를 납득했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연기력은 통하는 법이다.

내용과 메시지는 물론이고, 음악과 영상까지도 정말 좋아서 아름다운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

영화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One Cut of the Dead, 2017)

 

 

이제는 사용하지 않는 듯한 허름한 건물에서 한 여자가 자신에게 걸어오는 남자에게 도끼를 들이대며 애원한다. 좀비로 변한 남자는 본능에 충실해 여자를 알아보지 못하고 물려고 다가갔지만, 아직 온전한 인간인 여자는 남자가 이전과 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공격하지 못했다. 그러다 결국 여자는 남자에게 물려 끝을 맞이한다.

갑자기 들려온 “컷” 소리에 주변에 포진해있던 촬영 스태프들의 모습이 슬쩍 지나갔다. 그리고 이내 모두들 감독인 남자의 눈치를 봤는데, 그는 여자의 연기를 영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같은 장면을 수십 번 찍어도 연기가 나아지지 않는 여자 배우를 향해 감독은 모진 말을 해가며 감정을 이끌어내려고 하지만, 더 이상 촬영을 이어가기엔 그가 워낙 흥분 상태인 것 같아 진정을 시키기 위해 얼마간 휴식 시간을 갖게 된다.

남자 배우와 여자 배우, 분장사 셋이 남아 분위기를 좀 풀어보기 위해 촬영 중인 이 건물의 비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자신들이 찍고 있는 영화 소재인 좀비처럼 이 건물에서 사람을 대상으로 좀비를 만드는 실험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함께 일하던 스태프들이 진짜 좀비로 변해 그들에게 달려들고, 리얼리티를 강조하던 감독은 카메라를 들고 쫓아다니며 그 상황을 찍는다.

 

 

영화 속에 또 다른 영화로 시작되어 촬영 소재와 같은 사건이 진짜로 벌어졌다. 문제는 평범한 일상을 담은 그런 영화가 아니라 좀비 영화였고, 진짜 좀비가 나타났기 때문에 촬영 현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배우들이나 스태프는 기겁을 하고 난리가 났는데 감독 혼자만 기를 쓰고 촬영을 이어갔다. 도무지 제정신이 아니라고 보기에 충분한 행동이었다. 본인 작품에 미쳐도 단단히 미쳐있었다. 그래서 배우와 스태프들은 도망을 치지만 살아남은 사람보다 좀비의 수가 점점 늘어가서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좀비 영화에 빠지지 않는 클리셰가 등장했다. 소리만 지르는 여자, 여자를 지키려고 하는 남자, 그 사이에서 분쟁을 담당하는 캐릭터가 있었고, 좀비에게 물린 건지 아닌지 애매한 상처도 있었다. 강시도 아닌데 숨어서 숨을 죽이고 있으면 좀비에게 들키지 않았고 무기는 어떻게든 발견되기 마련이었다. 의외의 캐릭터가 살아남는 것 또한 결말의 특징이었다.

40분이 조금 되지 않게 이어간 리얼 좀비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까지 모두 올라간 뒤, 화면이 완전히 다른 장르로 바뀌어 당황스럽게 했다. 이 모든 게 좀비 채널 개국 스페셜 드라마로 기획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방송국 측은 개국 기념으로 특이하게 생방송 좀비 영화를 만들기 위해 감독부터 시작해 스태프, 배우 등 팀을 꾸리기 시작한다.
재미있었던 건 앞서 본 좀비 영화 속 사람들과 실제 인물들 간의 괴리가 컸다는 점이었다. 카메라를 멈추면 안 된다고 소리 높이던 감독은 영화와는 다르게 본인의 주관 없이 일단 시키면 시키는 대로 다 하는 타입이었다. 업계에서는 저렴하고 빠르게 찍는 감독으로 유명한 듯했다. 남자 배우는 좀 진지한 척하며 허세가 있는 듯 보였고, 아이돌 출신의 여자 배우는 힘들거나 비위생적인 건 안 하려고 했다. 외모만 보면 돌도 씹어 먹게 생긴 스태프 역할의 배우는 극도로 예민한 사람이라 물을 가려 마셔야 했고, 촬영장에도 술을 마시고 나타날 정도인 주정뱅이 스태프도 있었다. 감독은 열심히 해보려고 하는데 모인 사람들의 개성이 너무나 강해서 혼자만 끙끙 앓고 있었다.

촬영 준비를 하는 과정 외에 감독의 사생활도 등장했다는 게 특이한 부분이었다. 먼저 등장한 좀비 영화에서 분장사로 활약한 배우가 바로 아내였고, 딸은 영화감독을 꿈꾸며 촬영 스태프로 일하고 있었으나 너무 열정적이라 민폐만 끼친다는 걸 보여줬다.
감독의 가족들이 영화에 어떻게 관여하게 될지는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는데 우려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잘해줬다. 변수였던 건 감독이었다. 이전까지 사람들에게 최대한 맞춰주며 다소 굴욕적으로까지 보이던 감독은 촬영을 시작하자마자 쌓인 게 폭발한 것 같았다. 아이돌 출신 여자 배우를 몰아붙이고 진지한 척 헛소리를 해대던 남자 배우의 멱살을 잡고선 은근슬쩍 진심을 말했다. 감독에게만 변수가 있었던 게 아니라 스태프 역할의 배우들에게도 여러 변수가 일어나 코믹한 장면을 보여줬다.

 

 

보는 동안 영화 촬영이 얼마나 고된지 느껴졌다. 코믹하게 그려냈지만 그 노고를 보니 마냥 웃기에는 좀 안쓰러운 마음이 컸다. 영화의 비밀이 밝혀지기 전, 좀비 영화일 때는 감독 캐릭터가 왜 저러나 싶어서 마음에 안 들었는데, 촬영을 시작할 때까지의 비화를 보고 나니 응원하는 마음이 더 커졌다. 촬영을 엎어버리지 않고 현장에 투입되어 의도된 상황과 뜻밖의 상황을 잘 이어간 순발력이 좋았다. 코미디 장르에 좀 냉정한 편인데 덕분에 여러 번 피식거리며 웃었다.

러닝타임이 짧고 신선한 전개에 코믹이 더해져서 좋았다.

영화 카오스 워킹(Chaos Walking, 2021)

 

 

2257년 뉴 월드.
사람들은 생각이 바깥으로 드러나는 “노이즈”에 감염됐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목소리로 들리거나 영상화할 수 있었다. 훈련을 통해 생각을 감추는 사람이 있긴 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속마음을 감추는 게 어려웠다. 그래서 누군가를 향한 적의나 호의를 명쾌하게 알 수 있었다. 남자들은 전부 노이즈에 감염되어 생각을 읽을 수 있었으나 기이하게 여자들은 전혀 감염되지 않아 마음을 알 수 없었다.
1차 이주민이 자리를 잡았을 때 뉴 월드 행성의 원주민 스패클과의 전쟁으로 인해 여자들이 전부 몰살당했고, 토드의 엄마도 그때 돌아가셨다. 그 이후 프렌티스타운에 여자들은 존재하지 않게 됐다.

넬, 킬리언 아저씨와 농사를 지으며 사는 토드는 헛간에 도둑이 든 걸 보고 쫓아갔다가 우주선을 발견한다. 마을의 시장인 데이비드를 존경하고 그에게 인정을 받고 싶은 욕구가 가득했던 토드는 곧장 그에게 가서 알린다. 토드는 헛간에 든 도둑이 난생처음 보는 여자라는 존재임을 알고 깜짝 놀라며 신기해한다. 하지만 데이비드는 우주선을 타고 온 그녀로 인해 자신들이 위험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머나먼 미래, 아마도 지구에서 이주민이 가서 정착했을 뉴 월드라는 행성이 배경이라는 점과 여자는 존재하지 않고 남자만 살아남은 곳에서 생각이 바깥으로 드러나는 일종의 바이러스에 감염됐다는 설정이 굉장히 신선했다. 말로 하는 생각은 목소리처럼 바깥으로 흘러나왔고 상상하는 것들은 이미지화되어 일종의 환영처럼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이곳에는 비밀이 없었다. 데이비드 정도 되는 사람만이 생각을 감출 수 있었고, 그 외에 다른 보통의 사람들은 생각을 하지 않으려 애를 써야만 했다. 아직 어린 토드 또한 생각을 감추는 게 너무나 어려워서 자신의 이름만을 계속해서 되뇔 뿐이었다.

서로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남자들만 존재하는 곳에 우주선을 타고 온, 생각을 읽을 수 없는 여자 바이올라가 나타나자 모두들 놀라고 신기해했다. 토드 역시 마을의 여느 남자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데이비드는 바이올라가 타고 온 모선에 수천 명의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듣고는 지레 판단하여 그들보다 앞서 우주선을 덮치기로 했다.
문제는 바이올라가 데이비드의 계략을 다 들어버렸다는 데에 있었다. 그리고 토드는 그녀를 처음 발견해 위험에 빠지게 했다는 생각 때문에 바이올라의 도주를 돕기로 했다. 물론 그녀가 예쁘고 목소리도 듣기가 좋았다는 이유도 조금은 있었다.

영화 속 설정을 보여주고 이후 여자들이 어떻게 됐는지까지 모두 밝혀진 초반에 비밀을 모두 간파해버렸다. 배우는 여러 캐릭터를 연기하며 많은 이미지를 만들어내는데, 매즈 미켈슨은 불쌍하거나 악당이거나 둘 중 하나의 이미지로만 각인된 탓에 그가 이 영화의 악역이라는 걸 등장할 때부터 알 수 있었다. 혼자만 튀는 털옷을 입은 것만 봐도 권력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게 팍팍 느껴졌기에 더욱 확신했다.
중요한 건 그가 악당인지 아닌지가 아니라 데이비드와 수하들에게서 도망을 쳐서 모선에 연락할 방법을 찾아야 했던 토드와 바이올라였다. 생각이 바깥으로 드러나는 토드와 생각을 읽을 수 없는 바이올라의 동행이 처음엔 낯설었고, 조금 지나서는 토드가 불안해했다. 바이올라의 생각을 전혀 읽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을 진심으로 도와주고 싶어 하는 토드를 믿으며 그를 안심시켰다. 그 이후 둘 사이에 존재하던 경계심이 조금은 허물어져 목적을 향해 움직였다.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다른 마을로 이어져 진작에 알고 있던 비밀이 어마어마한 것이라도 되는 양 밝혀졌고, 또 다른 곳으로 이동해 마지막 결전을 벌이는데 너무 허무하게 끝이 나버렸다. 환영이라는 걸 알고 있었을 텐데 그렇게 겁을 낼 이유가 있었을까 싶다. 진정한 악역이라면 그런 것쯤은 가뿐히 무시해야 됐는데 데이비드 캐릭터에 정체성이 없었다.
악역에 큰 힘이 없다 보니 선한 역할인 토드와 바이올라에게도 큰 매력이 없었다. 두 사람은 그저 도망가는 데에만 급급했는데, 이 와중에 토드는 바이올라가 신기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본능 때문인지 생각이 다른 쪽으로만 흘러갔다. 처음엔 그게 좀 웃기긴 했으나 생각이 자꾸만 바깥으로 드러나다 보니 바이올라의 입장에서는 좀 불쾌했을 것 같다.

결국 이 영화는 여자애 하나를 잡겠다고 수십 명의 남자들이 쫓아간 내용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여자애의 등 뒤에는 엄청난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언급되긴 했으나 그게 바이올라를 잡아야 하는 명분이 될 수는 없었다.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라는 걸 알고 있었고, 영화를 재촬영했다는 사실 또한 알고 감상했다. 재촬영을 한 영화들은 대부분 평이 안 좋기 때문에 기대를 하지 않고 봤다. 그런데 예상했던 것보다 더 내용이 없었다. 비밀 따위는 진작에 알아채버려서 쫓고 도망가는 게 내용의 전부였다. 설마 영화를 소설처럼 3부작으로 만들 예정인가 싶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용이 없다는 건 차치하고 세계관이 너무나 아깝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막상 시리즈로 만든다고 한다면 별 기대가 안 돼서 볼 생각이 없다는 게 좀 모순적이긴 하다. 아무래도 시작이 별로 좋지 않아서 시리즈로 제작될 것 같진 않다.

먼 미래를 배경으로 한 영화답게 비주얼은 좋았다. 시각적으로 만족스러워서 아이맥스로 보면 제대로 눈요기를 할 수 있을 듯하지만, 내용이 없기 때문에 굳이 특별관에서 보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영화 퍼펙트 케어(I Care A Lot, 2020)

 

 

말라는 늙고 병들어 스스로를 돌볼 여력이 없는 사람들이 요양원에서 편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집과 재산 등을 대신 관리해 주는 케어 서비스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그녀는 주치의의 소견서를 받아 고객의 건강 상태를 확인한 후 법적으로 정식 후견인이 되는데, 사실 말라가 운영하는 회사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온갖 불법적인 일을 저지르고 있다. 겉으로는 법적인 문제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말라의 회사는 더욱 승승장구한다.

꽤 오랫동안 단물을 빨아먹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 노인이 몇 개월 만에 사망하자, 말라는 요양원 VIP 룸에 새로 들일 호구를 물색한다. 말라에게 여러 고객을 소개해 준 의사에게서 마침 딱 적당한 사람을 추천받는다. 40년간 금융권에서 일하다가 은퇴한 제니퍼는 결혼을 한 적이 없어서 남편, 자식이 없었고 친척들도 없었다. 부촌에서 혼자 사는 그녀가 막대한 현금 자산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된 말라는 곧바로 작업을 시작하지만, 제니퍼가 요양원에 들어가자마자 관련 인물 목록에 없는 변호사라는 사람에게 협박에 가까운 제안을 받는다.

 

 

말라는 겉으로 보기엔 너무나 훌륭한 일을 하고 있었다. 치매 등의 병을 앓고 있지만 가족과 자식조차 제대로 돌보지 않는 노인들의 법적 후견인이 되어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것만 봐서는 나무랄 데가 없었다. 영화 오프닝에서 한 남자가 요양원에 들어가지 못해 행패를 부린 이후 법원에서 말라와 대면하는 장면만 보면 그녀에게 희생정신이 있다고까지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말라는 뼛속까지 돈을 밝히는 속물이었다. 게다가 머리도 좋아서 불법적인 일은 절대 하지 않았다. 말라의 회사가 원활하게 운영되는 데에는 의사와 요양원 원장 등도 기여하고 있었다. 모두가 돈을 좋아하는 한통속이라 말라가 적당히 떼어주는 콩고물을 넙죽넙죽 받아먹으면서 그녀에게 협조를 했다.

그러던 차에 새로운 고객을 물색하다가 대어를 물게 됐다. 부유한 제니퍼에게 가족, 친척이 없다는 건 최상의 조건이었다. 후견인으로 법원의 인정만 받는다면 말라의 손에 들어오는 건 너무나 많을 터였다. 그래도 만일을 대비해 직원이자 연인인 프랜이 모든 것을 조사했는데, 제니퍼는 정말이지 아무런 문제 없이 깨끗했다. 의사와 손발을 맞춰 법원의 판결을 받아내 단골 요양원에 제니퍼를 집어넣기까지 무사히 성공한다.
말라가 무서웠던 부분은 모든 일을 합법적으로 처리했다는 것이었다. 영화 오프닝에 등장한 남자는 요양원에서 난동을 부리는 바람에 보호사나 경호 직원이 증인이 될 수 있었고 CCTV에도 찍혔을 게 분명했기 때문에 법원의 판결이 억울하더라도 일단 폭력적인 행동을 했으니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반면에 말라는 너무나 여우 같은 사람이라 자신의 속내를 온전히 드러낼 수 있는 프랜이나 의사, 요양원 원장 외에 사람들에겐 매너 있는 행동을 했다. 자신이 돌보는 노인들(이라 쓰고 호구라 읽음)에게도 책잡힐 일을 만들지 않았다.

 

 

이하 결말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음

이렇게 승승장구하기만 하던 말라의 앞을 가로막는 존재는 제니퍼의 알 수 없는 친구들이었다. 처음엔 젠틀하게 변호사 딘을 먼저 보내 제니퍼의 친구가 무서운 사람이라는 걸 말해줬지만, 말라는 이 일을 하며 너무나 많은 협박을 받아왔기 때문에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러다 딘이 가방에서 15만 달러를 보여주며 제니퍼를 풀어줄 것을 요구하자 말라는 더 큰 금액을 말했다. 굉장하다는 생각을 하고는 있었지만 말라는 예상보다 배포가 훨씬 컸다. 그 정도의 돈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더 많이 가졌을 거란 결론을 이미 마쳤다는 걸 보면 머리가 정말 빠르게 잘 돌아갔다.

말라가 더 많은 돈을 손에 넣기 위해 재보는 동안 제니퍼의 아들이 등장해 어머니를 빼오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분명 제니퍼가 결혼을 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어디서 나타난 아들인지는 대충 몇 가지 경우의 수를 예상할 수 있었다. 문제는 이 아들이 보기보다 무서운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튼튼해 보이는 차를 타고 다니며 경호원과 운전기사가 따로 있었고, 심부름을 해주는 부하들도 몇 있었다. 말라가 제니퍼의 아들과 본격적으로 대면한다면 그리 좋지 않은 결과가 있을 거라 예상했다. 아들의 정체가 밝혀진 이후에는 더욱 확신했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허술하게 흘러갔다는 점에서 후반에 김이 빠졌다. 아들의 정체만 놓고 봐도 말라는 상대도 안 되는 게임이었는데, 그녀는 너무나 빠르고 쉽게 모든 걸 처리했다. 말라가 일을 뚝딱뚝딱 해치울 수 있었던 건 곳곳에 허술한 설정들이 있던 덕분이었다. 승기를 말라 쪽에 기울게 하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만든 것일 테지만 보는 입장에서는 아쉬울 뿐이었다. 그렇게 당한 아들이 결말에 쉽게 인정을 하고 말라에게 어떤 제안을 하는 것 역시 조금은 이해할 수 없었다. 방법이 없었다고 너그럽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아들이 가진 힘을 생각한다면 그렇게 굽히는 게 사실 말이 안 됐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그렇게 결말을 향해 흘러가는 듯 보였는데, 끝나기 직전에 기어코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결국 돈 때문에 흥망성쇠 한 한 사람의 모습을 보여준 영화였다. 돈이 좋긴 하지만 죽을 때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점은 영화 속에 등장한 여러 인물들의 상황에 적합한 말이었다.

 

 

보는 내내 누구를 응원해야 할지 도통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시작부터 나쁜 사람이라는 걸 확실히 보여준 말라를 응원하기엔 양심이 찔렸고, 그렇다고 제니퍼 아들의 입장은 어머니의 상황을 보면 이해는 되지만 그 역시 좋은 사람이라고 볼 수 없었기에 응원할 수가 없었다. 그저 이쪽저쪽을 오가며 아무나 이겨라(?)라는 마음으로 봤다. 그러다 마지막에 그렇게 된 걸 보니 역시 사람은 처신을 잘 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특히나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 무슨 말도 해보기 전에 끝장날 수 있으니 말이다.

로자먼드 파이크는 이런 역할이 정말 잘 어울린다. 연기를 정말 잘하는 배우지만 정상적이고 양심적인 혹은 평범한 역할을 할 때는 그리 인상적이지 않은데, 약간 비정상적이고 사이코 같은 캐릭터를 연기할 때면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가 없다. <나를 찾아줘>에서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나쁜데 멋있는 역할이라 매력적이었다.
말라의 연인을 연기한 프랜이 예뻐서 누군가 했는데 <베이비 드라이버> 등의 영화에 출연한 에이사 곤살레스였다. 헤어스타일만 달라졌을 뿐인데 못 알아봤다. 그리고 출연하는 줄 몰랐던 피터 딘클리지는 처음 등장했을 때 무시무시했으나 갈수록 캐릭터의 성격이 달라져서 조금은 아쉬웠다.

후반으로 갈수록 허술해서 정말 아쉬웠지만 큰 기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난하게 감상한 영화였다.

영화 북클럽(Book Club, 2018)

 

 

성격도 다르고, 하는 일도 전혀 다르며, 심지어는 사랑에 관해서도 완전히 다른 네 친구들의 우정은 20대 때부터 현재까지, 무려 40년 동안 이어져오고 있다. 그들이 이렇게 오랫동안 진한 우정을 간직할 수 있었던 건 마음이 잘 맞는 덕분이기도 했지만 북클럽의 영향도 있었다. 순번을 돌아가면서 읽을 책을 정하고 다 읽은 뒤에는 토론을 하는 그녀들은 처음엔 책 이야기로 시작해 현재 자신들의 고민으로 빠지기 일쑤지만 만나기만 하면 언제나 즐거운 모임이었다.

그러던 중, 세 친구와는 다르게 단 한 번도 결혼을 하지 않고 오로지 남자와의 자유로운 연애, 섹스만 즐기던 비비안이 책을 골랐다. 영화로도 나온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였다. 무슨 내용인지 이미 알고 있는 듯 친구들은 질색을 했지만 비비안은 무조건 읽으라며 밀어붙였고, 어쩔 수 없이 책을 집어 든 세 친구 다이앤, 캐롤, 섀론은 점점 책에 푹 빠져들어 불타는 사랑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노년의 나이에 접어든 그녀들은 사람들이 인식하는 그 나이대의 여자들보다 훨씬 젊게 살고 있었다. 아직까지 일을 하며 자신의 자리에서 모두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있었다. 그녀들 중 가장 잘나가는 비비안은 호텔 CEO로 자유분방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현재의 삶을 즐기는 것이 최선이라고 여기는지 그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고 남자와 하룻밤을 보내는 등 쿨하게 살았다. 레스토랑 오너이자 셰프인 캐롤은 남편과의 사이가 여전히 좋았다. 결혼기념일을 아직까지 잘 챙겼고 서로에게 다정한 부부였다. 연방 법원 판사인 섀론은 남편과 이혼 후 줄곧 혼자 살아가고 있다. 남자를 만나기는커녕 거들떠보지도 않으며 일에만 매달린다. 다이앤은 사회로 나가기도 전에 아기를 가져 오랫동안 아내이자 엄마로 살았다. 두 딸은 각자 가정을 꾸려 멀리 애리조나에 살고 있었고, 남편은 작년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녀는 큰 외로움을 느끼지 못하고 살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누구나 부러워할 듯한 커리어 우먼의 삶, 완벽하고도 멋진 삶을 사는 네 여자의 모습으로 보였는데, 모든 사람이 그렇듯 그녀들에게도 각자의 문제점은 있었다. 다이앤의 두 딸은 혼자 살고 있는 엄마를 걱정하는 듯 자신들 곁으로 이사를 오라고 재촉하는데 들을 때마다 노인네 취급을 하는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 캐롤은 남편과 섹스를 하지 않은지 몇 개월이나 되어 갑자기 불안해졌고, 섀론은 얼마 전 전남편이 아들과 비슷한 나이대의 여자와 약혼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극을 받는다. 그리고 비비안은 아주 오래전 자신에게 청혼했었던 남자와 재회했는데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이렇게 각자의 문제점과 고민들을 안고 있는 와중에 숨어서 읽어야 될 것 같은 내용의 책이 북클럽의 다음 책으로 정해져 읽기 시작한 그녀들은 강한 자극을 받는다. 덕분에 그녀들은 사랑이 충만해져 남편이나 재회한 남자, 새로 만난 남자들과 잘 해보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녀들의 모습을 보며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딱 적확하다는 생각을 내내 했다. 그녀들은 나이가 들었을 뿐, 일이나 생활, 새로 만난 사랑 등 매사에 열정적이었고 최선을 다했다. 나이가 들어도 새로운 만남, 도전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던 섀론과 다이앤은 각각 데이트 사이트에 가입해 남자들을 만나거나 마음이 잘 맞는 남자와의 놀라운 경험에 즐거워했다. 유일하게 남편이 생존해있는 캐롤은 비비안의 조언에 따라 약(?)이라도 써서 남편과의 관계를 개선해보고자 했다. 그리고 진정한 사랑에서 늘 도망치기만 했던 비비안은 자신을 사랑해 주는 남자가 아직까지 있고 그 사람을 붙잡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기도 했다.

새로운 것은 언제나 두렵고 겁이 나기 마련이다. 그건 나이가 들어도 여전했다. 오히려 나이가 있기 때문에 더 움츠려들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오늘, 지금 이 순간은 가장 젊은 시기이기 때문에 언제나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 후회하지 않는다는 걸 그녀들을 통해 보여줬다. 마음만 청춘이 아니라 삶 자체를 청춘으로 여기는 모습이라 보기 좋았고, 또 그녀들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다이안 키튼 외에는 낯선 배우들이 등장하는 영화였는데, 알고 보니 이 배우들이 엄청난 분들이었다. 여러 영화제에서 다수의 수상을 한 노련한 배우들이었다. 한자리에 모으는 것도 쉽지 않았을 텐데 코미디를 내세워 앞으로 남은 많은 나날에 대해 말하는 영화에 출연해 즐거움을 줬다. 연기 경력이 대단한 배우들이라 그런지 능청스럽기 그지없었다. 어쩜 그렇게 리얼하게 연기들을 잘 하시던지 정말 재미있어서 몇 번이나 웃음이 터졌다.

많은 영화들에서 볼 수 있는 비슷한 의미를 담은 내용이라 식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짧은 러닝타임에 가볍게 볼 수 있었던 코미디라 좋았다.

영화 호라이즌 라인(Horizon Line, 2020)

 

 

런던에서 일하는 사라는 친구 파스칼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모리셔스로 향한다. 1년 전 사라는 모리셔스에서 살면서 행복한 나날을 보냈었는데, 다시 돌아온 이곳은 변함없이 아름다워서 옛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 기억 속에서 함께 행복했었던 사랑하는 연인 잭슨과 1년 만에 재회하게 된다. 잭슨은 모리셔스에 남고 사라는 런던으로 떠나야만 했던 1년 전의 끝맺음이 좋지 않아 여태껏 서로 연락을 하지 않았던 두 사람은 앙금이 남아있었지만 그보다는 애정이 더 컸다. 덕분에 어쩌다 보니 밤을 같이 보내게 됐고, 다음날 다른 섬에서 결혼을 하는 파스칼과 함께 배를 타고 가기로 했었는데 늦잠을 자는 바람에 놓치고 만다.

다행히 사라와 잭슨은 결혼식이 열릴 예정인 섬으로 가는 경비행기에 탈 수 있었다. 친분이 있는 조종사와 함께 비행기에 올라 목적지로 향하는데, 조종대를 잡은 그가 갑자기 심장마비를 일으켰다. 약을 삼키기도 전에 쓰러진 조종사로 인해 조수석에 앉아있던 사라는 얼떨결에 조종대를 잡아 추락하던 비행기를 원상태로 복구시키지만, 그는 이미 사망했고 비행기 운전은 곁에서 대충 배운 것뿐이라 두 사람은 막막하기만 하다.

 

 

주요 캐릭터의 사연이나 캐릭터끼리의 갈등 요소 등이 있는 건 모든 영화가 그렇긴 하지만 재난 생존 영화에는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필수 조건인가 보다. 이 영화에서는 본격적인 사고가 일어나기 전, 헤어진 듯 아닌 듯 보이던 사라와 잭슨 사이에 미묘한 감정선이 오갔다. 영화 초반에는 1년 전 시점을 배경으로 모리셔스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던 두 사람의 모습을 보여줬다. 사라는 런던으로 가야 하는 상황이었고 잭슨은 모리셔스에 남기로 결정한 듯했다. 두 사람 모두 결정을 번복하지는 않을 것 같았는데 왠지 서로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차마 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도 서로를 배려한 탓이겠지만, 그로 인해 깔끔한 이별을 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래서 1년 만에 재회했을 때 묘한 기운이 감돌았고, 예전 일을 끄집어 내 뒤늦게 감정싸움을 하다가 꽁꽁 얼어있던 애정이 갑자기 녹아 함께 밤을 보냈다. 하지만 도망치는 사람은 여전히 버릇을 고치지 못했고, 토라진 사람 역시 뒤끝이 오래갔다.

이런 두 사람이 배를 놓치는 바람에 경비행기에 함께 오르게 되는데, 문제는 조종사가 사망하면서부터였다. 두 사람 모두 비행기를 몰아본 경험이 없어서 자동조종장치를 설정하지만 고장이 났는지 조종대만 놓으면 비행기가 바다로 떨어졌다. GPS도 잡히지 않고, 고도가 높은 탓인지 핸드폰도 터지지 않았다. 관제탑과 통신도 잘되지 않았고 연료 역시 간당간당했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에 단둘뿐인 높은 상공에서 사라와 잭슨은 감정을 우선할 게 아니라 일단 살고 보는 게 우선이었기 때문에 함께 힘을 합쳐 안전하게 가까운 육지로 착륙하고자 했다. 착륙하는 방법은 몰라도 어떻게든 해야만 했다.

재난 생존 영화이기 때문에 두 사람에게 온갖 위험이 닥치는 건 당연한 얘기였다. 폭풍우도 만나보고 각자 한 번씩 안정장치 없이 위험천만한 상황에 몸을 던졌다. 둘 중 하나가 사망하는 등의 끔찍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예상하긴 했으나 그래도 그런 장면을 보니 아슬아슬했다. 워낙 역동적인 상황이 끊임없이 등장해서 그런지 영화를 3D나 4DX 등의 특별관에서 상영을 해주면 스릴을 체험할 수 있어서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난 생존 영화에서 볼 수 있는 기본적인 옵션은 모두 담긴 영화였다. 배경만 달라졌을 뿐 살 수 있을랑 말랑하는 밀당 같은 긴장감을 마지막까지 유지했다. 이 와중에 도움이 된 맥가이버식(?) 지식이 있었고, 영화 초반에 등장해 뭔가 있겠다 싶었던 두 가지 물품이 후반 위기를 타개하는 데 큰 도움을 줬다. 이런 영화를 보다 보면 백과사전 급 지식이 아니라 사소해서 잊어버리기 쉬운 자잘한 지식이 더 도움이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가볍게 보기에 무난했던 오락 영화였다.

영화 세자매(Three Sisters, 2020)

 

 

어릴 때 함께 놀며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주기도 했고, 어떨 땐 가장 의지가 되는 존재이기도 했던 세 자매는 어느덧 중년의 나이가 되어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같은 환경에서 자랐어도 어떤 삶을 살게 되는지는 너무나 다르기 마련이라 세 자매 역시 살아가는 환경, 성격까지 완전히 다르다.

첫째 희숙은 작은 꽃집을 운영하며 반항기 가득한 딸 보미와 살고 있다. 남편은 집에 들어오는 둥 마는 둥 하며 돈 문제로 여러 번 속을 썩이는 바람에 동생들에게 돈을 빌리기도 했다. 희숙은 안 그래도 소심하고 다 자기 잘못이라고, 미안하다고 말하는 사람인데 이런 이유 때문인지 동생들 볼 면목이 없어 연락조차 하지 못한다.
둘째 미연은 완벽한 가정을 꾸리고 있었다. 남편은 대학교수이고, 두 아이들은 바르게 잘 자라고 있었으며, 얼마 전에는 신도시에 넓은 평수 아파트를 분양받기도 했다. 그런데 겉으로 보기에만 완벽했지 속은 곪아서 터지기 일보 직전이다.
극작가인 셋째 미옥은 요즘 따라 글이 잘 안 써져서 대낮부터 술을 마시며 밥은 제대로 챙기지 않는다. 툭하면 술에 취해 미연 언니에게 전화해 술 주정을 하며 귀찮게 한다. 거기다 남편과 전처 사이에서 태어난 의붓아들은 자신을 많이 이상한 아줌마로 생각하는 것 같다.

 

 

모두 다 가정을 꾸리고 아이가 있는 나이의 세 자매들이었는데, 중년쯤이 되었을 그들이었어도 삶이 뜻대로 흘러가지 않아 어렵기만 했다. 남편이 속을 썩이고 자식의 반항 또한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 외에도 크고 작은 일들이 세 사람을 괴롭고 힘들게 만들었다. 그리고 당연히 서로에 대한 걱정까지 더해져 바람 잘 날 없는 나날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세 자매와 비슷하게 날마다 이런저런 걱정으로 살아간다는 면에서 평범한 우리네의 삶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걱정거리는 때때로 평범의 범주를 넘어선 것이라 놀라움을 주기도 했다.

각자의 삶에 갑자기 나타난 문제에 대응하는 방식이 성격에 따라 제각각이라 안타깝기도 했고 때로는 코믹한 분위기를 풍겼다.
학교에 가는 의붓아들을 배웅하고 숨겨둔 소주를 꺼내 마시던 미옥은 거침없는 성격답게 문제에 대응하는 방법도 거침이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은 필터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입으로 흘러나왔고, 행동 역시 일단 저지르고 보는 타입이었다. 덕분에 미옥이 등장할 때마다 웃음을 터트리게 만들었다. 그런데 가만 보면 미옥이 정말 생각 없이 사는 것 같아 매번 술 주정을 듣는 미연에게 감정이 이입되어 조금 짜증이 날 때도 있었으나 뒤끝이 없고 의리가 있었다는 점에서 조금은 든든한 캐릭터였다.
둘째 미연은 어릴 때부터 다녔던 교회를 지금까지도 꾸준히 다녀 신실한 믿음이 있었다. 교회에서 성가대 지휘자로 활동하는 집사인 걸 보면 교회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미연과 남편이 등장했을 때부터 어떤 걱정이 그녀를 힘들게 할지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조한철 배우님 죄송..) 재미있던 건 미연의 반응이었다. 믿음을 가진 교인답게 겉으로는 차분하게 상황을 파악하려고 하며 지켜보다가 확실해지자 돌변해 당연히 그랬을 법한 행동을 했다. 그리고 후반엔 상여자의 면모를 보여주며 미연이 그저 평범한 가정주부가 아닌 부와 두뇌로 사람을 조지는 스타일이라는 걸 보여줘서 통쾌했다.
두 동생들과는 다르게 희숙은 제일 안타까웠다. 남편은 돈만 가져가는 돈벌레였고, 딸 보미는 보는 사람조차도 부담되는 반항을 하고 있었다. 원체 소심했던 희숙에게 버거운 가족들이었기에 그녀의 얼굴이 클로즈업될 때마다 안쓰러워서 혼났다. 거기다 희숙에게는 짐이 하나 더 얹어졌기에 막막하고 답답하기만 했다. 희숙이 삶을 사는 데에는 그 어떤 희망도, 재미도 없는 것 같아서 가장 마음이 쓰였다.

 

 

이하 결말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음

이렇게 세 자매의 가정에서 일어난 각각의 문제들을 중심으로 흘러가며 해결을 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그러다 후반에는 해결이 됐든 안 됐든 일단 제쳐두고, 세 자매의 가족 모두 아버지의 생신 기념으로 한자리에 모이게 됐다. 고향집으로 간 장면을 통해 그녀들에게는 교회에 열심히 다녀 장로가 된 아버지와 역시나 비슷한 위치에 있을 어머니, 그리고 마음이 아픈 동생 진섭이라는 또 다른 가족들이 있다는 걸 보여줬다. 그리고 영화 초반에 잠깐 등장한 장면을 통해 예상할 수 있었던 세 자매가 공통으로 소속된 가족의 문제점을 드러냈다.

그 장면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진 않았다는 점에서 참 다행이었다. 하지만 들려오는 소리와 아이들의 뒷모습, 심지어는 담배를 피우는 남자의 하관을 보며 고통을 예상할 수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알 수 없었던, 교회를 다니는 사람의 실체가 얼마나 가식적인지 치가 떨렸다. 더 화가 났던 건 동네 사람의 반응이었다. 오래전이고 아마도 시골 마을이라 집에 숟가락이 몇 개인지 다 알 정도로 동네 사람들은 가까웠을 텐데, 미연의 한마디 말에 버럭 소리를 지르며 하는 말이 분통 터졌다. 옛날에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게 당연했을 테지만 요즘 같으면 어림도 없을 일이었다. 오히려 묵인했다고 손가락질 받을 행동이었다.

이렇게 어릴 적 폭로로 영화의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그때 아이들이었던 자식들은 중년이 되어 제 아이를 기르고 있는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다는 걸 보여줬다. 어떤 상처는 오랫동안 잊을 수 없기도 했다. 늘 미안하다는 말이 버릇처럼 나오게 된 희숙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기도를 했던 미연도, 어려서 당시의 상황만 기억하고 있던 미옥 모두에게 어떻게든 상처로 남아 지워지지 않았다.
그녀들의 울부짖음에 가여운 어머니와 빌어먹을 아버지는 일단 이 자리를 피해보고자 애를 썼는데, 그런 와중에 여태껏 희숙의 속을 썩이기만 했던 보미가 내질러줘서 얼마나 통쾌했는지 모른다. 어른들은 사과를 할 줄 모른다는 보미의 말에 깊이 공감하기도 했다. 애초에 그런 식의 잘못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게 당연하지만, 만약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진정한 사과를 해야 된다고 본다.

 

 

축하하는 자리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 파투가 났어도 남매, 자매들끼리의 정은 여전히 돈독했다. 아마 같은 경험을 했다는 점에서 서로의 사이가 단단해져 부서지지 않는 걸지도 몰랐다. 그런 모습이 많이 공감됐다.

정말 매력적인 캐릭터가 다양하게 등장한다는 점에서 영화를 생기 넘치게 만들었다. 세 자매 각각의 캐릭터도 매력 있었는데, 그녀들의 가족들 역시 인상적이었다. 보미는 좀 미웠다가 그래도 딸이구나 싶었고, 미연의 남편은 중간에 적반하장이라 정말 화가 났다. 욕이 막 나오려는 걸 참고 머릿속으로만 생각했다. 그리고 미옥의 남편은 너무 착하고 좋은 사람이라 나중엔 귀엽기도 했다. 미옥의 성질머리를 다 받아줄 정도로 착하고 순한 사람인데 중반 이후 어떤 장면에서 의붓아들과 함께 안쓰러우면서도 웃음이 터지게 만들었다.

세 자매를 연기한 배우들의 자연스러움 덕분에 영화에 몰입할 수 있었다. 김선영, 문소리, 장윤주 세 배우 모두 인상적이었고 이미지에 잘 어울리는 연기를 보여줬다. 특히나 장윤주 배우는 <베테랑> 이후 두 번째 연기인데 너무 잘 소화해내서 놀랐다. 쉽지 않은 돌아이 역할인데 누가 보면 평상시 모습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을 연기를 보여줬다.

포스터로는 예상할 수 없는, 조금은 심각한 내용도 있는 영화였지만 충분히 인상적이었고 좋았다.

영화 컴플리트 언노운(Complete Unknown, 2016)

 

 

생일을 맞이한 톰은 집에서 축하 파티를 하기 위해 아내 라미나와 함께 요리를 준비해 친구들을 초대한다. 그런데 주문한 생일 케이크에 적힌 이름이 “토니”라고 되어 있어 톰은 파티를 시작하기도 전에 불쾌해졌다. 거기다 라미나의 일과 관련된 문제로 대화를 하다가 의견 충돌이 생겨 기분이 좀 상했다. 이런 상황임에도 초대된 친구들이 있었으니 어찌 됐든 파티는 해야 했다.

톰이 케이크 문제로 가게에 간 사이에 친구들이 도착했다. 그중에는 톰과 함께 일하는 클라이드도 있었는데, 그는 최근에 만나 친해진 앨리스를 데리고 왔다. 톰이 집으로 돌아와 파티를 시작하려는데 친구들 사이에서 앨리스를 발견해 클라이드가 그녀를 소개해 준다. 정중한 듯 오가는 대화 속에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느껴지고, 그 분위기는 식사 자리를 포함해 클럽으로까지 이어진다.

 

 

이하 결말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음

영화는 앨리스의 다양한 모습으로 시작됐다. 이름은 물론이고 헤어스타일, 옷차림, 직업 모두 다른 사람이었으나 그들은 전부 앨리스였다.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앨리스는 이름까지 다르게 사용하며 서로 다른 인생을 살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 앨리스가 응시하던 피아노와 노부인이 차를 몰고 나오는 어느 집을 지켜보는 장면을 통해 그곳에 그녀의 진짜 인생에 대한 단서가 있다는 걸 보여줬다. 그립지만 이제는 되돌아갈 수 없는 인생인 듯했다.

이후 앨리스는 회사 홈페이지를 통해 알아낸 클라이드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다. 톰을 만나기 위한 목적이었다. 매력적인 앨리스에게 호감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었던 터라 클라이드는 자연스레 톰의 생일 파티에 그녀를 동반했다. 톰은 앨리스의 이름을 듣자마자 의문스러운 표정을 보였고, 식사 자리에서 그녀가 이야기하는 경험담이나 쟁점에 대해 딴지를 걸었다.
식사가 끝난 후 친구들이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톰과 앨리스가 단둘이 이야기를 할 기회가 생겼고 그때 두 사람의 관계가 드러났다. 15년 전, 앨리스가 진짜 이름인 제니라고 불렸던 시절에 두 사람은 아마도 친구 이상의 사이였고 부모님도 아는 듯했다. 그녀가 갑작스레 집을 떠난 후, 제니의 부모님이 톰을 찾아와 딸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달라고 애원했었다고 말했다. 그의 말을 듣는 앨리스는 자기 나름의 항변을 하지만 톰은 이해하질 못했다.
그러다가 자리를 옮겨 클럽에서 클라이드와 대화를 하다가 거짓말이 들통난 앨리스가 자리를 떠나고 톰이 그 뒤를 따라가면서 그녀가 어떤 인생을 살게 됐는지 직접 경험하게 된다.

사람은 한 번쯤 인생을 리셋하고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하는 일이나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가 뜻대로 흘러가지 않아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 때로 돌아가고 싶기도 할 것이고, 이제 막 태어난 듯 아예 새롭게 시작하면 어떨까 상상해본 경험도 있을지 모른다. 앨리스는 제니라고 불리던 시절의 자신의 인생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고, 막상 집에서 나와 새로운 이름과 낯선 스타일로 삶을 시작해보니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란 걸 느꼈다. 그래서 매번 다른 지역, 다른 나라에서 다른 이름으로 여러 일을 하며 살았다. 평범한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감히 도전할 수 없는 과감한 결정이고 굉장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내 삶이 내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는다고 해서 현재 가진 것들을 모두 버리고 떠나 새롭게 시작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가진 게 아무리 없어도 그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톰은 그녀의 말을 듣고서도 이해를 하지 못했다.
하지만 우연한 상황에 앨리스의 거짓말에 어쩌다 동조하게 되면서 톰은 앨리스가 만들어준 그 잠깐의 인생에 몰입하게 됐다. 그런 모습을 보며 톰 역시 자신의 현재 삶에 그리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집을 떠나야 되는 아내 라미나의 일, 자신이 여태껏 해온 직업 등 할 수만 있다면 그 역시 새롭게 시작해 자신이 만들어나가고 싶은 인생을 찾아 떠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만큼 새로운 삶이 매력적으로 느껴진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톰은 함께 가겠느냐고 묻는 앨리스의 말에 대답을 하지 않음으로써 의사를 표현했다. 대신 앨리스가 그를 만나고 싶어서 찾아왔던 지금처럼 언제 어디서 문득 자신의 진짜 존재를 확인하고 싶을 때 항상 그 자리에 있을 거라는 위안을 줬다. 톰의 그 말은 아내 라미나와의 관계가 지금과는 달라진다는 걸 의미했는데, 그건 영화 초반에 예견된 것이었다. 반면에 앨리스에겐 든든한 나무 같은 말이었기에 그녀는 다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었다.

 

 

제목조차 생소한 이 영화는 네이버 시리즈온에 무료 영화로 올라와 있어서 알게 됐다. 연기를 진짜 잘하는 마이클 섀넌과 아름다운 레이첼 와이즈가 출연해 눈길을 끌었다. 그래서 궁금해져 보기 시작했는데, 보는 동안에는 대체 무슨 말을 하고픈 건지 감을 잡을 수 없었으나 글을 쓰며 생각을 하니까 좀 정리가 됐다. 그런 면에서 보면 영화의 설정이 특이한데 전달 방식이 깔끔하거나 인상적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저 출연한 배우들이 좋아서 끝까지 봤고, 러닝타임이 짧은 편이라 금세 볼 수 있었다.

마이클 섀넌과 레이첼 와이즈의 이름으로 떠오르는 이미지만으로는 왠지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나니 생각보다 괜찮은 조합이었다. 마이클 섀넌의 진중한 이미지와 레이첼 와이즈의 미스터리한 분위기가 참 좋았다. 마지막에 두 사람이 담백하게 끝을 낸 부분이 마음에 들었다.

영화 소울(Soul, 2020)

 

 

중학교에서 밴드부 임시 교사로 일하는 조는 교장으로부터 정식 교사가 될 거라는 말을 듣지만, 영 기쁘지 않다. 조가 정말로 하고 싶었던 일은 재즈 밴드였기 때문이다. 정식 교사 제안을 받아들이라는 엄마의 압박으로 얼떨결에 대답을 하긴 했어도 마음은 다른 데에 가 있다.
그러던 중, 오래전에 가르친 제자에게서 유명한 재즈 뮤지션 도로테아 윌리엄스의 공연에 피아노 반주를 해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연락을 받는다. 형식상의 오디션을 본 조는 깐깐한 도로테아를 만족시켜 그날 저녁에 바로 무대에 오르기로 한다. 신이 난 조는 친구에게 재즈 공연을 할 수 있게 됐다고 전화로 자랑을 하다가 그만 맨홀에 빠지고 만다.

깨어난 조는 자신의 몸이 이상한 형체를 띠고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는데, 이내 “머나먼 저세상”이라는 무시무시한 곳으로 들어갈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다. 꿈에 그리던 재즈 공연 무대에 오를 날이라 죽고 싶지 않았던 조는 발버둥을 치다가 “태어나기 전 세상”에 떨어진다. 그곳에서 조는 문제 영혼 22의 멘토가 된다.

 

 

세상엔 조와 같은 어른들이 많을 것이다. 어렸을 때 자신이 좋아하는 게 뭔지 깨닫고, 그게 꿈으로 이어져 관련된 공부를 하고 졸업 후에 사회에 발을 디디게 되지만 꿈을 직업으로 가진 어른은 거의 드물었다. 낙타는 바늘구멍을 통과하기가 너무나 힘이 들고, 하늘이 내린 기회 같은 건 일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것이라 대부분의 어른들은 꿈과는 상관없는 일을 하며 살아간다.
조가 그나마 나아 보였던 건 그래도 밴드와 관련된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재즈 밴드와 중학생 밴드 사이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긴 했지만 말이다. 거기다 정식 교사 제안까지 받았으니 조의 앞날은 탄탄대로라 기뻐해도 됐겠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마음속에는 아직까지 재즈 밴드라는 꿈이 너무나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 있던 조가 천금같은 기회를 얻고 손에 꽉 붙잡아 이제 꿈을 실현시킬 새로운 인생의 첫 발을 내디디려는 찰나, 죽은 건지 아닌지 애매모호한 상태에서 죽은 사람들이 가는 곳으로 빨려 들어갈 위기에 처한다. 재능이 있는 사람에게 온 기회였기에 보고 있는 나조차도 너무나 아까웠다. 그래서 조의 심정이나 돌아가고자 하는 발버둥이 이해가 됐다.
그러다 다행히 새로운 세상에 떨어지는데, 그곳은 태어나기 전의 영혼들이 각각의 성격과 재능 등을 부여받는 곳이었다. 관리자인 제리들이 당황스러워하는 조를 다른 누군가로 착각해 멘토 임무를 주는데, 조가 맡은 멘티는 지구에서 태어나고 싶지 않아 “태어나기 전 세상”에 아주 오랫동안 머문 22였다. 그는 얼마나 오래 머물렀는지 억 단위의 숫자가 넘어가는 영혼들이 멘티 교육을 받을 동안 22라는 숫자로 살며 그곳을 떠나지 않았고, 그의 멘토로는 링컨을 포함해 마더 테레사, 간디, 코페르니쿠스, 마리 앙투아네트 등이 있었으나 두 손 두 발을 다 들고 포기했을 정도로 문제적 영혼이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면 22가 그곳에 머무르려고 하는 게 왠지 조금은 이해가 됐다. 지구에서 아등바등 살아가는 것보다 아무런 욕구 없이 거의 무존재에 가깝게 살아가는 것도 썩 나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몸이 존재하지 않으니 식욕이나 수면욕 등의 기본적인 욕구를 가질 수가 없고, 영혼이라 아프지도 않다고 했다. 세상은 너무 치열하고 나이가 들수록 삶이 쉽지 않다는 걸 깨닫고 또 깨닫는 어른이라서 그런지 존재와 무존재 사이에 있는 22가 조금은 부러웠다.

지구에서 살고자 하는 욕구가 없는 22와 꿈을 코앞에 두고 놓치게 생겨 반드시 자신의 몸이 있는 지구로 돌아가야만 했던 조는 제리들 모르게 일종의 계약을 맺고 영혼의 불꽃이 되어줄 삶의 목적을 찾아 나서게 된다. 그 과정에서 22가 왜 그렇게 오랫동안 태어날 수 없었는지 밝혀졌고, “머나먼 저세상”의 테리가 조의 부재를 알게 되면서 그를 찾아 헤매기 시작한다.

 

 

조가 자신의 몸으로 생각보다 빨리 돌아갈 수 있게 되지만 역시나 쉽게 돌려보내 줄 리가 없었다. 조와 22의 기이한 동행이 이어지면서 여러 번 코믹한 장면을 보여줬다. 둘만 통하는 대화와 목소리, 그리고 행동 등이 웃음을 줬다.

그러다 조와 22 둘 모두 삶에 대해 깨닫는 과정으로 이어졌다.
조는 꿈인 재즈 밴드만을 좇으며 주변을 둘러보지 않았다.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에 그 어떤 의미를 두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조의 가르침 덕분에 유명한 뮤지션의 밴드 드러머가 된 옛 제자가 그를 꿈에 한 발자국 다가설 수 있는 기회를 줬다. 그리고 진짜는 아니었지만 밴드를 더 이상 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는 아이에게 속마음이 뭔지 깨닫게 하고, 오랫동안 알던 친구의 인생을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덕분에 조는 꿈에 대해, 좋아하는 것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됐다.
22 같은 경우는 그 어떤 것에도 흥미를 느낄 수가 없어서 목적을 찾지 못해 오랫동안 영혼으로만 지냈다. 거쳐간 멘토들은 모두 마지막 불꽃을 찾아야 지구에서 태어날 수 있다며 22를 닦달했지만 딱히 무언가를 찾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다 조와 함께 지구에서 짧은 시간을 보낸 후, 살아서 존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 것인지 깨닫게 된다.

목적을 가지고 꿈을 좇으며 살아가는 인생만이 가치가 있는 게 아니었다.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우리 모두는 가치 있는 인간이었다. 그걸 말하는 과정을 경이롭게, 그러면서 따뜻하고도 행복하게 그려냈다. 목적을 향해 달려가던 어른들에게 주변을 둘러보며 천천히 가도 괜찮다고 어깨를 두드리고, 무언가를 좇기만 하지는 않아도 괜찮다고 안아주는 그런 내용을 담고 있었다.

 

 

후반부에 영화가 담고 있는 진짜 메시지가 서서히 드러나며 깨달음을 줬을 때 울컥해져서 당연히 눈물이 났다. 픽사는 아이들을 위한 애니메이션이 아닌 어른들을 울리고 감동을 주는 애니메이션을 이번에도 만들어냈다. 몇 년 동안 되는 일이 없어 영화와 책으로 심적 도피를 했던 내게 큰 위로가 됐다.

원래 이 영화는 미국에서 작년 6월 개봉 예정이었으나, 자꾸만 밀리고 또 밀리다가 결국 해를 넘겨 개봉했다. 개봉한 게 어디냐며 감지덕지한 마음으로 극장으로 달려가서 봤는데 역시나 픽사는 픽사였다.
영혼 캐릭터들의 모양이나 태어나기 전 영혼들의 해맑은 모습이 너무나 귀여웠다. 그리고 태어나기 전 세상이라는 상상도 못했던 공간을 정말 아기자기하게 그려냈다. 마치 솜사탕 안에 들어앉은 듯 색감이나 몽글몽글한 표현이 정말 좋았다. 주인공 조가 재즈와 깊은 관련이 있어서 그런지 음악에도 신경을 많이 쓴 듯 귀가 즐거웠다. 시각적, 청각적으로 아주 만족스러웠고, 물론 내용도 정말 좋았다.

어른들을 울리는 픽사의 애니메이션은 언제나 최고다.

Scroll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