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교의 형성기

기원전 5세기 말이 되면서 성경의 역사상의 이야기는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마카베오 1,2서와 같은 저작들이 나온 기원전 2세기(기원전 175년 이후)에 가서야 유대인의 사료들은 제기된다.

유다의 사정이 모호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이 시기(4반 세기)동안 상부 이집트의 유대인 식민지의 운명은

엘레판틴 문서에 상세히 밝혀져 있다.

기원전 410년에 엘레판틴에서 페르시아 군사령관의 묵인 아래 크눔 제사장들이 주도한 폭동이 일어났고,

이 와중에 그곳의 유대인 성전이 파괴되었다.

이후 유다 공동체를 비롯해 유대인에 관한 기록이 전무하기 때문에 유대인이 그곳에 있었다는 것 외에는 할 말이 없다.

 

한편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과의 관계는 계속 악화되었다.

사마리아 오경의 확정은 둘사이의 불화가 극에 달했던 기원전 2세기 말에 이루어진 듯하다.

왜냐하면 사마리아 사람들이 유대인들과 완전히 결별하고 별개의 종파로 부상하게 된 것이 이 무렵이었기 때문이다.

사마리아인들이 그리짐 산에 그들의 성전을 세울 조치를 취한 것은 분명 페르시아 시대 말기였을 것이다.

 

유다의 사정에 관해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유다는 자체의 화폐를 찍어내고 내국세를 징수하는 정도의 권한이 허용된 자치 국가의 지위를 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아람어가 히브리어를 대신하여 유대인의 일상어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히브리어는 종교적 강론과 저술의 언어로 존속했을 뿐만 아니라

유대에서는 계속 남아 있는 구어로서 그리스도교 초세기까지 이어졌다.

이는 꿈란 두루마리와 그 밖의 필사본 등 출토품들이 잘 보여준다.

 

기원전 4세기의 팔레스타인은 이후 거의 한 세기동안 톨레마이오스 왕조에 의해 통치되었다.

한 세기가 지날 무렵 유대인들은 이집트를 격파한 안티오쿠스를 스스로 환영하였다.

안티오쿠스가 취한 일련의 조치들,

특히 시급했던 성전 수리도 국가의 도움으로 완료할 수 있었다.

당시 서아시아의 모든 민족들에게 헬레니즘 문화가 영향을 미쳤다.

 

안티오쿠스에게 뇌물을 바쳐 부정하게 대제사장이 된 야손은

더 많은 돈을 낸 메델라우스에 의해 3년만에 쫓겨나 요르단 동편으로 도망해야 했다.

안티오쿠스는 기원전 169년에 이집트 침공에서 승리를 거두고 돌아오는 길에

메넬라우스의 묵인 하에 성전을 약탈하여 그 성물과 기물들을 쓸어가고

심지어 성전 전면의 금박까지 벗겨감으로써

그가 유대인들의 권리와 종교적 민감성에 대해 얼마나 무관심했는지를 보여 주었다.

이후 그는 유대인들의 비 타협적인 태도가 종교 때문임을 알고 그의 부왕이 허용한 특혜들을 폐지하고

사실상 유대교 관습을 금하는 칙령을 공포했다.

정기적인 희생제사는 물론이고 안식일과 전통적인 절기를 지키는 것도 금지되었다.

율법의 사본들은 파기하라는 명령이 내려졌고,

어린이들의 할례도 금지되었다. 제우스 제의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추종을 거부하고

수동적인 저항을 강화하면서 율법의 사소한 조항이라도 범하는 것보다는 죽음을 선택했다.

이들에 대해 안티오쿠스는 잔혹한 박해로 대처했다.

 

다니엘서가 기록되고 있었을 즈음에도 극도로 격앙된 유대인들은

그들을 괴롭히는 박해자에 항거하여 무장 봉기를 하고 있었다.

반란은 안티오쿠스가 모데인의 마을에 그의 악명높은 포고령을 내린지 얼마되지 않아 폭발했다.

이에 마타티아스의 아들 유다 마카베오를 중심으로 한 반란은  성공적인 출발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숱한 좌절과 실망으로 점철된 기나긴 투쟁이었지만,

결국 유대인들에게 종교적 자유와 정치적 자치권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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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은 반란이다.

 

유대교의 형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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