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21 그램(21 Grams, 2003)

심장이 좋지 않아 이식만을 기다리고 있는 폴은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오랜 기다림에 지쳐 이제는 포기 상태에 가까워졌는데, 그의 아내 메리는 폴의 아기를 가지고 싶어서 인공수정을 하려고 남편을 설득한다. 폴은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아내의 바람을 들어준다. 그리고 얼마 후, 기적적으로 심장을 구했다는 연락을 받은 폴은 이식 수술을 받고 건강을 되찾는다.

과거에 온갖 범죄를 저지르며 감옥에도 다녀왔던 잭은 종교에 대한 믿음을 통해 이제는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가족과 함께 교회에 나가고 엇나가는 청소년에게 종교적 신념을 전달하는 등 이전과는 다르게 산다. 그러나 그가 일으킨 사고로 인해 다른 사람의 가족을 망가뜨렸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족까지 완전히 무너지게 만들었다.

마약 중독자로 살았던 크리스티나는 현재 남편, 두 딸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작스러운 사고가 일어나 그녀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되어 이전의 약물 중독자로 되돌아가고 만다.

이하 결말 스포일러 및 개인적인 생각을 포함하고 있음

영화는 서로 관련이 없는 세 사람의 시점에서 시작되어 사고 이후 그들이 엮이게 되는 과정을 보여줬다. 사고가 일어나기 전 세 사람의 삶, 사고 직후 변해버린 그들의 삶, 사고 후 시간이 어느 정도 흘러 절망과 복수의 삶이라는 세 가지 시간대가 무작위로 튀어나왔다. 처음에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곧 죽을 것 같던 폴이 멀쩡해져서 크리스티나를 만나고, 당당해 보이던 잭이 피폐해진 모습으로 등장해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금세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에 구성에 익숙해졌다.
세 사람이 어떻게 엮이게 되는지는 대강의 줄거리로도 파악이 가능했다. 잭이 낸 교통사고로 크리스티나의 가족이 사망하고, 크리스티나 남편의 심장이 폴에게 이식되어 새 삶을 얻었다. 교통사고로 두 비극과 하나의 새로운 기회가 생겼다. 절망과 희망이라는 상반된 삶이 갑자기 닥쳐온 세 사람이 엮이지 않을 수 없었다.

전과자였던 잭은 종교를 통해 새로운 삶을 살게 됐다고 자부했으나 사고를 낸 직후에는 두려워서 신고도 하지 않고 도망쳐버렸다. 갑작스러운 상황 앞에 이전과 달라진 게 없는 행동을 했다. 도망친 이후에 자수를 하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이미 상황은 바꿀 수 없을 정도로 나빠졌다. 피해를 입은 크리스티나는 가해자인 잭과 비슷했다. 가족을 모두 잃은 후 그녀는 이전처럼 다시 마약에 손을 댔다. 한순간에 소중한 가족 모두를 잃은 크리스티나를 버티게 해주는 건 마약뿐이었기 때문이다. 폴은 이전부터 아기를 원하지 않았지만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아기를 가지고 싶다는 아내의 바람을 들어주려고 했다. 그러나 심장을 이식받은 후에는 다시금 아기가 필요 없다는 입장을 내보였다. 그 배경에는 아내가 폴 몰래 유산인지 낙태인지 모를 무언가를 했다는 이유가 있었지만, 왠지 그 이유뿐만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 사람이 비극과 희망이라는 새로운 삶의 길을 가게 됐는데 처한 환경이 달라졌어도 습관, 성격, 행동 등은 변하지 않았다. 비약일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그들이 가진 기본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흐른 뒤에는 각자 다른 이유로 타성을 벗을 수 있게 됐는데 그게 그리 긍정적이고 희망적이지는 않았다.
잭은 자신이 저지른 죄 때문에 가족들이 손가락질 받는 걸 볼 수가 없어서 그들을 떠나 홀로 죗값을 치르며 살아갔다. 스스로 회개하는 삶을 살고자 한 것이었다. 폴은 자신에게 심장을 기증한 사람의 가족을 찾으려고 애를 쓰다 크리스티나의 존재를 알게 됐고, 무슨 이유 때문인지 그녀에게 호감을 느껴 푹 빠지고 말았다. 가족이 떠난 후 살아야 할 이유가 없어진 크리스티나는 자신에게 다가온 폴이 남편의 심장을 기증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에 그를 받아들였고 급기야는 복수를 해야겠다며 손을 빌렸다.
이때부터 이들의 관계가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쪽으로 흐른 것 같다. 죄를 뉘우치면서 죽여주기를 바라는 잭, 낯설었던 크리스티나에게 빠져 대신 복수를 하려고 하지만 차마 살인을 할 수는 없었던 폴, 남편의 심장을 가진 폴을 밀어냈다가 도로 받아들이는 크리스티나까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선 사람들이었다. 특히나 폴은 왜 크리스티나를 사랑하게 됐는지 잘 모르겠다. 이식받은 심장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뉘앙스는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당최 알 수 없는 부분이다.

이유 모를 그들의 행동을 영화 제목인 <21 그램>과 연관 지어 생각해보면 세 사람이 각자 선택의 기로에 선 바로 그때가 21그램의 영혼을 잃은 순간이라고 말하는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잭이 사고를 내고 도망친 순간, 크리스티나가 복수를 하겠다고 울부짖던 순간, 폴이 대신 복수를 하기 위해 나섰던 순간이었다.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그 순간들이 영혼을 잃어버렸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렇게 영혼을 잃고 일상의 틀에서 벗어나 극한까지 치달았던 그들의 삶이 모든 게 끝난 뒤에는 이전처럼 되돌아갔다는 건 숙명적이었다. 잭은 가족에게 돌아갔고 크리스티나에겐 잃어버린 아기가 생겼으며, 폴은 원래의 운명대로 세상을 떠났다. 하나의 사고로 인해 각자의 인생의 길에서 어긋나버렸지만 운명은 그들을 기어코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영혼을 잃어버릴 만큼 비극적인 상황을 맞이해도 운명은 벗어날 수 없다, 뭐 그런 뜻이 아닐까 생각해봤다.

유명한 배우들이 출연하고, 아카데미와 칸 영화제에서 주목을 받는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이 연출한 영화다. 제목은 예전부터 들어서 알고 있었고 21그램의 영혼이라는 설정도 알고 있었다. 그 외에는 무슨 내용인지 전혀 몰랐기 때문에 영화를 보기 시작하면서부터 조금 당황스러움을 느꼈다. 일반적인 전개 구성이 아닌 데다가 시간대도 들쭉날쭉했고 내용도 상당히 난해했기 때문이다. 정말 오랜만에 머리 터지게 생각하고 또 생각하게 만든 영화지만, 정리가 잘되지 않아 아무 말이나 막 쓴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보통 이런 영화들은 나중에 다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야 하는데 이 영화는 한 번 봤으니 이제 안 볼 것 같다. 뭐, 나중에 마음이 바뀔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궁금한 건 영혼의 무게가 진짜로 21그램이냐는 것이다. 누군가가 사람이 죽을 때 무게를 재보기라도 한 건가 싶다. 한 사람의 전부나 다름없는 영혼이 고작 초콜릿 바 하나 정도의 무게라니, 보잘것없는 무게의 영혼으로 아등바등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왠지 허무하기도 하다.

 

 

영화 21 그램(21 Grams,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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