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테넷(TENET, 2020)

러시아의 오페라 극장에서 테러가 일어난다. 그 사실을 미리 알고 있던 한 무리의 사람들이 현장에 도착한 테러 제압 요원으로 위장하여 극장에 침투해 타깃을 찾는다. 한 남자가 타깃을 찾아내고 그가 가진 물건도 손에 넣지만, 오페라 극장에 남은 많은 관객들이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무고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되돌아갔다가 테러리스트에게 잡히고 만다. 비밀을 알아내려고 고문하는 테러리스트들에게 저항하던 남자는 최후의 사태에 대비한 약을 먹고 죽음을 선택하지만 이내 깨어난다.

자신도 알지 못했던 테스트에 통과한 남자는 제3차 세계대전을 막기 위한 1인으로 선택됐다. 지시에 따라 어느 연구소에 가게 된 남자는 미래에서 현재로 보내진 물건들의 역행하는 움직임에 놀라워한다. 그 물건들이 무슨 목적으로 미래에서 현재로 보내졌는지 알아내기 위해 몇몇 사람을 만나고, 도움을 줄 닐과 함께 행동을 개시한다. 남자는 러시아 출신의 사토르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걸 알고 그를 증오하는 아내 캣과 협력한다.

다가올 미래의 전쟁은 핵무기보다 더 끔찍할 수 있는 시간을 무기로 이용했다. 우리에게 익숙한 개념으로 시간이 흐르는 게 아닌 시간을 역행하는 기술이 무자비한 자의 손에 쥐여진다면 세계는 종말을 맞이하게 될 거라고 예상했다. 그 무자비한 자라는 형용사에 적합했던 인물이 사토르였다. 가진 게 없어서 무엇이든 해야 했던 사토르에게 우연찮게 천운과도 같은 기회가 주어졌고, 그걸 활용해 세계를 무너뜨릴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사토르를 막아야 하는 사람으로 테스트를 통과한 유일한 남자는 주도자였다.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무고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되돌아가는 대의가 우선이었고, 동료들을 고발하기보다는 자신의 죽음을 택할 만큼 도리를 아는 남자였다. 이런 사람에게 세상을 구할 기회를 주는 게 어찌 보면 당연했다.

주도자가 인버전된 물건의 움직임에 익숙해진 뒤에 사토르와 자리를 마련해 줄 캣에게 접근하게 된다. 아들을 마치 인질처럼 잡고 놔주지 않아 사토르에게서 벗어날 수 없어 절망에 빠진 여자였다. 그래서 주도자의 제안도 믿지 않지만 그가 할 수 있다는 걸 직접 보여준 덕분에 캣은 증오하는 남편을 소개해 준다. 하지만 사토르는 지금의 자리에 오기까지 수많은 일을 겪었던 인물이라 뜬금없는 직함으로 나타난 주도자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세계의 종말을 맞이할 계획에 착수하고, 닐과 주도자는 사토르를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그 과정에서 인버전이라 불리는 기술이 영화 곳곳에 활용되었다. 현재의 사람이 과거로 가거나 혹은 미래로 가며 시간을 넘나드는 구성이 영화에 집중하게 만들었다. 초중반쯤에 공항에서 일어났던 사건이 영화 중반 이후 다시 등장해 비밀이 밝혀졌고, 스릴 넘치던 카 체이싱 장면에서도 또 한 번 놀라게 만들었다.
여러 영화에서 닳고 닳도록 써먹은 시간 여행이라는 설정을 인류의 종말을 막는 상황에 대입한 건데, 너무나도 익숙한 시간 여행을 이렇게 사용한 게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행과 역행을 자유자재로 보여주며 헷갈리지 않도록 만들어낸 몇몇 설정에 대한 아이디어가 신선했고, 후반으로 가면서는 그 설정을 점점 더 크게 활용하여 역시 놀란의 아날로그 방식이라며 감탄하게 만들었다.

이하 간접적인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음

중반 이후로 사토르와 주도자가 본격적으로 대립하게 되면서 어찌나 흥미진진했는지 모르겠다. 밀어붙이는 자와 막으려는 자의 모습이 주가 됐지만, 주도자의 편에 선 닐과 캣의 활약도 만만치 않게 긴장하게 만들었다. 주도자를 도와주는 닐의 정체가 처음엔 의심스러웠으나 곳곳에서 활약을 하며 주도자가 중심을 잃지 않도록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곤 했다. 인버전을 겪었기 때문에 바꿀 수 있음에도 그러면 안 된다는 것 또한 닐이 자각하게 했다. 캣은 처음엔 사토르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나약한 여자인 것 같았다. 물론 아들을 미끼로 그녀를 쥐락펴락하고 있어서 어찌할 수 없긴 했지만 어느 정도는 체념하고 있는 게 보였다. 하지만 막상 중요한 때가 왔을 때 캣은 주도적으로 행동했다. 모든 게 끝나버릴 수도 있었던 위험한 상황이었음에도 마지막까지 참고 또 참다가 사토르의 의지에 거스르는 결과를 그녀의 손으로 직접 만들어냈다는 게 아주 좋았다.

마지막엔 주도자와 캣 사이에 스치듯 지나갔던 무언가가 그렇게 이어지는 것을 보며 그 장면에 등장한 캐릭터의 한결같은 성격이 영화 속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걸 깨닫게 했다. 비밀을 지키는 게 우선이었던 그 인물과는 달리 누군가를 지키는 게 먼저였던 주도자였기 때문에 세상은 주도자를 중심으로 흘러가야만 했다.

너무나 좋아하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기다리고 기다리던 신작인데 개봉이 자꾸 밀려서 극장에서 못 보나 걱정했다. 예매를 해놨더니 또 난리가 나서 용산 아이맥스는 전부 취소되는 사태에 이르렀다. 언제나 그렇듯 예매를 못 하기도 했지만 이번만큼은 거리가 좀 있는 용산보다는 가까운 곳에서 보려고 한 게 다행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다른 지역 아이맥스도 취소될까 봐 조마조마했었는데 용산만큼 폭발적인 곳이 아니라서 처음 예매한 아이맥스 상영관에서 무사히 볼 수 있었다.

러닝타임이 150분이나 되고 마스크도 내내 쓰고 있어야 해서 걱정했는데, 그 시간 내내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을 만큼 영화에 몰입했다. 시작부터 오페라 극장이 폭발했고 주인공도 죽었다 살아났고, 영화 속 설정에 대한 갖은 설명에 집중하게 만들었다. 이해하지 못하면 그냥 느끼라던 영화 속 대사 덕분에 조금은 긴장을 풀고 봤더니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도 모를 정도로 푹 빠져서 봤고, 너무 재미있어서 N차 관람을 해야 된다는 생각도 들었다.
세계를 구하는 뻔한 설정에 시간 여행만 첨가했을 뿐인데 이런 각본이 나오다니 크리스토퍼 놀란은 정말 최고다. 언제나 그렇듯 CG를 싫어하는 감독답게 비행기도 폭파시키고 후반엔 여기저기 막 터트려줘서 시원시원했다. 그리고 늘 단점으로 지적받았던 액션이 이번엔 장점으로 변한 것 또한 영화를 즐겁게 만들었다.
안타까운 점은 이번엔 한스 짐머가 영화 음악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스 짐머 덕분에 놀란 감독의 영화 OST가 언제나 좋았었는데, 이번엔 다소 무난하긴 했어도 가끔씩 과하다는 느낌이 들어서 조금은 아쉬웠다.

네이버 영화 정보에는 이름이 없지만 캐스팅에는 “The Protagonist”로 지칭된 주인공 존 데이비드 워싱턴의 연기가 돋보였다. 굳은 의지를 가지고 무엇이 중요한지 아는 인물을 잘 보여줬다. 로버트 패틴슨의 연기는 많이 본 적이 없어서 잘 어울릴까 싶었는데 의외로 너무 좋았고, 케네스 브래너는 억양까지 캐릭터에 맞게 바꿔서 악당의 면모를 제대로 보여줬다. 캣 역할의 엘리자베스 데비키는 정말 멋있었다. 몇몇 영화에서 봤었지만 그리 인상적이지 않았는데 캣 역할은 제 옷을 입은 듯 너무 잘 어울렸다. 우아한 모습은 물론이고 주체적으로 변하게 되는 여성 캐릭터라 좋았다.

번이나 전율을 일으켜 역시나 최애 감독님이라는 걸 확인시켜준 영화였다.

 

영화 테넷(TENET,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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