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소리도 없이(Voice of Silence, 2020)

 

 

트럭을 몰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부업으로 달걀을 파는 창복과 태인의 본업은 범죄 조직의 청소부였다. 범죄 조직원들이 누군가를 처리하려고 할 때, 아지트에 가서 타깃을 매달고 뒤처리를 깔끔하게 하기 위해 바닥에 비닐을 까는 것부터 시작해서 그들이 임무를 끝냈을 때 사체를 땅에 묻는 일까지 도맡아 했다. 조직원들이 사람을 편히 죽일 수 있도록 부수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셈이었다. 자신들을 믿고 많은 일을 맡기는 실장 덕분에 이 바닥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실장이 부탁을 했다. 이번에는 누군가를 죽이는 것과 관련된 일이 아닌 사람 하나를 며칠간 데리고 있어 달라는 것이었다. 창복과 태인에게 각자의 사정이 있고 해본 적이 없는 일이다 보니 정중하게 거절을 했는데, 협박에 가까운 부탁을 계속 거절하기 어려워서 알겠다고 했다. 그런데 실장이 맡아달라고 한 사람이 열한 살 된 여자아이라는 게 문제가 됐다.

 

 

창복과 태인은 오묘한 관계였다. 딱 보기에 형제는 아니고 그렇다고 부자 관계도 아니었다. 친인척이라고도 볼 수 없었다. 말을 못 하는 것인지 안 하는 것인지, 아무튼 말이 없던 태인에게 혼자 주절주절 떠들어대던 창복의 말에 따르면 그가 태인을 어렸을 때 거둬 먹여 이만큼이나 키운 것이라고 했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아마도 애매했겠지만 현재는 거의 가족이나 다름없는 관계였다. 그래서 서로를 믿고 범죄 조직의 뒷수습을 하는 기이한 일을 함께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들이 초희를 맡고 난 이후, 보는 눈이 많다던 창복보다는 태인이 아이를 집에 데리고 가는 게 낫겠다는 반강제적 결정이 내려지면서 이 관계가 어떻게 변하게 될 것인지 예감했다. 초희를 맡기 전에 보여준 장면을 통해 태인이 누군가와 함께 살고 있다는 걸 보여줬었는데, 그게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그러다 초희를 집에 데리고 가게 되면서 초희보다 조금 어린 여자아이 문주가 등장했다. 태인을 오빠라 부르며 따르는 티 없이 해맑기만 한 문주가 진짜로 태인의 친동생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둘의 관계를 보면 여지없이 큰 오빠와 막냇동생처럼 보였다.
처음엔 태인을 두려워하며 도망치려고 생각했던 초희는 그들과 예상보다 오래 함께 살게 되면서 이 모호한 관계에 동화되기 시작했다. 문주를 자신의 동생처럼 보살피고 공부를 시키며 씻기기까지 했다. 어질러진 집안을 정돈하고 식사예절까지 가르치는 걸 보니 집에서 제법 엄격하게 교육을 받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일단은 유괴한 아이인 초희를 집에 둘 수 없어서 태인이 본업을 위해 데리고 나갔을 때, 피가 잔뜩 묻은 쓰레기를 줍는 태인을 도왔고 사람을 빨리 묻을 수 있게 고사리 손으로 흙을 덮어주기도 했다.
초희만 그들을 처음과는 다르게 인식하게 된 게 아니라 태인과 창복 역시 초희를 딸처럼, 동생처럼 여기는 관계로 변했다. 결혼도 하지 않고 혼자 살고 있다는 창복의 입장에서는 어린 태인을 거뒀을 때처럼 초희를 대하는 듯했다. 그리고 태인은 자신의 집에서 동생 문주를 살뜰하게 보살피고 집안일까지 돕는 초희에게 정이 갈 수밖에 없었다.

 

 

이하 결말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음
어떻게 보면 이들의 관계는 스톡홀름 증후군과 리마 증후군이 동시에 나타났다고 볼 수 있겠으나 한편으로는 흔하게 볼 수 있는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생활하지 않았기 때문에 의외로 따뜻한 서로에게 마음이 기운 것이라고 느껴졌다. 특히나 초희 입장에서는 피를 나눈 가족보다 창복, 태인, 문주가 훨씬 더 진짜 가족 같았다. 제 자식이 유괴됐는데 아버지란 인간이 어떻게든 아이 몸값을 깎으려고 한다는 걸 초희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3대 독자라던 남동생이 원래 타깃이었으나 어쩌다 보니 초희가 납치된 바람에 이 사단이 일어난 것이었다. 창복이 유괴 전문가에게 전해 들은 말을 읊어주는 것뿐이었지만, 초희가 가족들 사이에서 어떤 위치였는지, 어떤 대접을 받고 살아왔는지 예상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래서 낯설지만 함께 있으면 따뜻하고 즐겁기도 한 그들과의 기이한 동거에 편안함을 느낀 것이었다.

이들의 관계가 오래 지속되지 않을 거라는 건 당연했다. 그 과정에서 창복이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고 그걸 모르는 태인은 지시받은 대로 초희를 다른 누군가에게 넘겨주지만, 동생처럼 보살폈던 아이가 눈에 밟혀 다시 데리고 오기 위해 무모한 결정을 내린다.
그 모습은 초반부터 느꼈던 아이러니가 부각되는 것처럼 보였다. 사람을 죽이는 조직원들의 뒤처리를 해주면서도 직접적인 범죄에는 절대 발을 담그지는 않았던 창복과 태인이었다. 심지어 창복은 신실한 기독교 신자로 사람을 묻을 때 성경을 들고 기도를 해주며, 때로는 머리를 북쪽에 놔드려야 한다고 고인에 대한 나름의 배려를 했다. 그랬기에 유괴된 아이 초희를 맡게 됐을 때 기겁을 했던 것이고, 몸값을 받으러 갈 때 저러다 쓰러지겠다 싶을 정도로 긴장했다. 태인 역시 죽은 사람을 묻은 적은 있어도 누군가를 해쳐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해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리고 초희 역시 그들과 비슷했다는 게 가장 인상에 남았다. 납치된 아이치고는 제법 잘 지냈고 다른 곳에 맡겨졌다 다시 돌아왔을 때도 잠깐 분노하긴 했지만 결국 스스로 태인의 손을 붙잡았다. 마지막에 원래 자신이 있던 곳으로 돌아와 태인에게 불리한 말을 했으면서도 걱정하는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부모, 가족이 데리러 왔을 때 그동안의 생기 넘치던 표정을 지우고 집에서 교육받은 대로의 예의 바른 아이로 돌아온 것을 보며 씁쓸함이 남았다.

창복이 어떻게 됐는지도 모른 채 돈도 못 받았는데 아이를 무사히 데려다준 태인과 납치되었지만 즐거운 며칠을 보냈던 초희 두 사람 모두 토끼를 따라 굴에 들어갔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느껴졌다. 정말 이상한 상황이지만 즐겁고 아무 생각 없이 웃을 수 있던 시간이 지나고 자신이 발을 딛고 사는 무표정한 현실로 돌아가야만 했던 두 사람이 마지막에 남긴 표정에서 안타까운 여운을 느꼈다.

 

 

영화 예고편이 공개됐을 때부터 궁금했었는데 개봉 첫 주에 못 보고 지나친 후에 안 좋은 평을 많이 봐서 나중으로 미뤄뒀었다. 호평과 혹평이 공존하는 영화라 일단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감상했다.
이 영화를 보고 나니 대체로 평이 좀 갈리는 영화들은 내게 괜찮게 느껴지는 게 많다는 걸 깨달았다. 좋아서 추천할 정도까진 아니었지만 생각보다는 훨씬 괜찮게 봤다. 허술하게 느껴지는 구석도 있었으나 이상한 관계나 사람 자체의 모순을 생각하면 흥미로운 설정이 많았다. 시작은 좋지 못했어도 함께 지내다 보니 진짜 가족 같아진 그들의 모습이 신선했다. 그리고 초희를 생각하면 안타깝기도 했다.

배우들의 호연이 돋보였다. 대사 한 마디 없이 표정과 행동으로 감정을 표현해냈던 유아인 배우의 연기가 인상적이었다. 비슷한 나이대의 배우들 중에 단연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줘서 앞으로가 더 기대된다. 그런 태인의 곁에서 그를 상대하는 초희 역할의 아역 문승아 배우 역시 제법 잘 한다고 생각했는데, 결말 부분의 장면에서 표정이 확 바뀌는 걸 보고 소름이 돋았다. 어린아이의 표정 변화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라 정말 깜짝 놀랐다. 앞으로 다른 영화에서도 만나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영화 소리도 없이(Voice of Silence,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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