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색, 계(Lust, Caution, 2007)

1942년 일제강점기의 상하이. 왕정위 친일 괴뢰 정부 고위층 주거지역 중 친일파의 핵심 인물인 이의 집에 부인들이 모여서 즐겁게 마작을 하고 있다. 그중에는 막 부인이라 불리는 젊은 여인도 있었다. 홍콩에서 상하이로 온 그녀를 이 부인은 이전부터 알고 있었던 듯 살갑게 대하며 다른 부인들과 함께 이런저런 대화를 하며 마작을 했고, 그 사이에 이가 집에 도착해 그녀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여러 사람들이 있는 가운데 막 부인과 이가 은근슬쩍 주고받는 눈빛은 예사롭지 않다.

4년 전, 왕치아즈는 중국으로 쳐들어온 일본군을 피해 홍콩으로 피난을 떠나 대학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왕치아즈는 광유민을 만나 친구와 함께 연극 극단에 들어가게 된다. 일본에 함락당한 조국 중국을 위해 호소하는 내용의 연극이 성공적인 결과를 얻어내자, 연극을 함께 한 친구들은 무대에 오른 경험을 바탕으로 신분을 위장해 매국노를 잡아 처단할 원대한 계획을 세운다.

현재 시점인 1942년에 요염한 눈빛을 흘리는 막 부인과 4년 전 연극 초짜 대학생으로 무대에 올랐던 왕치아즈는 동일 인물이었다. 어설프게나마 무대에 올랐던 경험으로 시작한 그녀의 연기는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많이 노련해져 있었다. 연기라는 것을 모르고 보면 전혀 눈치채지 못할 만큼 왕치아즈는 만들어낸 캐릭터인 막 부인 그 자체가 되어있었다.

갑작스럽게 홍콩으로 떠나오게 된 왕치아즈가 연극을 하게 된 계기는 애국 연극을 무대에 올려 저항 자금을 마련하겠다는 광유민의 말 때문이었다. 아버지와 동생은 영국에 있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왕치아즈 역시 영국으로 가려고 했으나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나라를 벗어날 수 없게 됐다. 그래서 겨우 피난을 온 곳이 홍콩이었는데, 마침 동향 친구들과 사귀면서 나라를 위해 싸우고자 하는 뜻이 맞아떨어져 뭐라도 해보겠다는 심산으로 연극을 하게 된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전쟁 한복판에서 홀로 남은 왕치아즈가 붙잡을 수 있었던 유일한 인간관계였기 때문에 연극을 시작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상을 벗어난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 혼자라는 사실은 그녀를 더욱 외롭게 만들었다.

그렇게 시작한 연극이 뜻밖의 성공을 거둔 뒤, 광유민이 친일파 이의 부하로 일하는 고향 선배를 만나게 되면서 연극반 친구들은 무모한 계획을 세운다. 저항 단체들도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친일파 고위급에게 다가가겠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보였지만, 무대에 한 번 올랐을 뿐인 왕치아즈의 순발력과 재치 덕분에 이 부인의 호감을 얻어 가까워진다. 그리고 그들의 타깃인 이 역시 아름다운 외모의 막 부인을 연기하는 왕치아즈에게 서서히 빠져들게 된다.
하지만 이가 친일파 관료 중에서도 워낙 중요한 인물이라 그를 노리는 저항 단체가 많았던 탓인지 막 부인에게 넘어간 듯 보였어도 막상 중요한 때에는 선을 그었다. 그녀에게 지대한 관심이 있다는 건 눈에 보일 정도였지만, 좀처럼 믿음은 줄 수 없는 듯했다. 그럼에도 이는 막 부인을 더 알고 싶었고 가지고 싶었다. 왕치아즈는 이의 마음을 눈치채고 원치 않았던 만반의 준비와 연습까지 마쳤으나 이가 갑작스레 상하이로 돌아가게 되면서 이제껏 해온 모든 것들이 물거품이 돼버리고 말았다.


이하 결말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음

처음에 왕치아즈가 막 부인 역할을 맡게 된 건 오로지 애국심 때문이었다. 나라를 잃은 설움이 가득 찬 마음에 친일파를 처단하겠다는 명목은 그녀를 움직이게 할 동기가 되었다. 설령 그녀의 임무가 지난한 것이었어도 개의치 않았다. 연극 친구들을 제외하면 그녀가 마음을 기울일 가까운 사람이 없기 때문인 것 같기도 했다. 사람이 혼자 살아갈 수는 있지만 인간관계까지 단절되면 사는 데 의미가 없었다. 가족이 없는 왕치아즈가 관계의 연속을 위해 친구들의 계획에 동참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무모하게 시작한 그들의 계획이 점점 길어지면서 왕치아즈는 혼란스러운 감정을 느낀다. 목적이 있어서 친구들과 함께 움직인 것이긴 하나,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고 위험해지는 건 왕치아즈뿐이었다. 이가 자신에게 빠져들도록 유혹하면서도 그녀 자신은 그에게 빠져선 안 됐었고, 자신의 정체와 목적 또한 들키면 끝장이었다.
그런데 이가 워낙 경계심이 심해서 왕치아즈는 진심을 다해서, 진짜처럼 보이도록 연기해야만 했다. 얼굴만 들여다봐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아는 듯한 이의 눈빛에 겁을 먹어 피하고 싶어도 그는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래서 왕치아즈는 정말로 이를 사랑하는 것처럼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를 했다.
몇 번의 정사가 이어지는 동안 왕치아즈가 자신에게서 절대로 고개를 돌리지 못하게 했던 이가 마침내 그녀를 품에 안는 그 순간에 비로소 왕치아즈를 향한 믿음이 생겨났다. 누군가를 쉽게 믿을 수 없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믿음을 갖게 된 이후에 보여주는 행동은 이전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친절하면서도 왠지 모를 냉기가 풍겼던 때와 달리 왕치아즈 앞에서는 눈빛마저 부드러워졌고 그녀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해주고 싶어 했다. 심지어는 그녀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나약한 면까지 보였다.

를 유혹해 믿음을 얻어 처단하기 위한 목적이었으나 예상치도 못하게 그의 진심을 느끼게 되면서 왕치아즈 역시 마음이 흔들리게 된다. 이를 반드시 죽여야 된다는 복수심과 같은 강력한 동기가 있었다면 모르겠지만, 그녀에겐 그런 게 없었다. 거기다 일이 시작되고 나자 친구들은 왕치아즈의 안위를 걱정하면서도 이의 처단을 우선시하는 면을 보였기 때문에 어쩌면 그녀는 자신이 도구로 이용되고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예를 보여준 에피소드가 성 경험 예행연습이었다. 누군가의 아내로 위장했기 때문에 당연히 성 경험이 있어야 했고, 이를 유혹해 넘어오게 하려면 노련해야 하기도 했다. 그래서 아직 경험이 없는 왕치아즈를 이성 친구들 중 한 명과 몇 번이고 연습하도록 했다. 주어진 과제를 하듯 마음에도 없는 사람과 일을 치르는 것보다 불쾌했던 건, 친구들이 왕치아즈가 없는 자리에서 그것에 대한 의논을 끝내고 결과만 통보했다는 데에 있었다. 그 상황 자체가 너무 기분이 나빴는데 왕치아즈는 오죽했을까 싶다. 믿었던 친구들에게 배신감까지 느꼈을 것 같다.

그런 이유에 이의 진심이 더해져 왕치아즈는 이에게 마음이 기울어버리고 말았다. 자신을 의심했었으나 이제는 온전히 믿으며 진심을 내보이는 남자에게 흔들리지 않을 여자가 몇이나 될까 싶다. 가뜩이나 외롭고 또 힘든 상황에 자신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남자였기 때문에 왕치아즈는 그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차마 그를 죽게 내버려 둘 수 없었기에 왕치아즈는 짧은 인생에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는 열정적인 사랑을 받은 것에 위안을 삼아 미련 없는 표정으로 끝을 맞이했다.
그리고 남겨진 이는 냉정함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왕치아즈를 향한 진심 어린 사랑은 마음에 깊이 새겨져 지워지지 않을 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객관적으로 보면 왕치아즈의 행동은 욕을 먹어도 충분하다. 친일파를 처단하라고 보냈더니 사랑에 빠졌다니, 배경이 중국이 아니라 우리나라였다고 상상하면 욕에서 끝나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이 영화는 친일파 처단의 목적보다는 이루어지지 못할 사랑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 너그럽게 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이 역할의 배우가 양조위였기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게 오히려 더 말이 안 됐을 것 같다.(양조위를 캐스팅한 것부터가 반칙!)
놀라운 사실 한 가지는 왕치아즈가 실존 인물을 모델로 했다는 점이다. 간첩으로 활동한 정핑루라는 여성이 일제 침략기의 첩보기술자 딩모춘에게 접근해 암살하려다 들켜 총살을 당했다고 한다. 영화 속 왕치아즈의 삶과 완전히 같지는 않겠지만, 어려운 시대에 나라를 위해 싸운 여성의 실화라는 점이 대단하다.

10년도 더 전에 개봉한 이 영화는 극장에서 보려고 했으나 당시 주변 인간들이 영화 내용과는 관계없이 불쾌한 얘기만 해대서 갑자기 보고 싶지 않아졌었다. 한 번 놓치고 나니 계속 보기를 미뤄왔었던 것 같다.
뒤늦게 본 영화는 러닝타임이 158분이나 되어 걱정했었는데 지루한 줄도 모르고 빠져들었다. 현재에서 과거로, 과거에서 다시 현재로 이어지는 과정을 왕치아즈의 시선으로 보여주며 그녀가 느끼는 감정과 그 변화를 와닿게 만들었다. 영화가 제작됐을 당시에 탕웨이가 거의 신인급이었다는데 연기를 정말 잘했다. 혼란스러운 시대에 자신이 누구이고 무엇을 하고 있는 건지 의미를 잃어버린 것 같은 섬세한 표현이 좋았다. 그리고 양조위는 당연히 좋았다. 내가 본 영화 속 양조위는 대체로 배신당하거나 버려지는 캐릭터로 익숙했는데, 이 영화의 중반까지는 젠틀한데 악랄해 보여서 놀랐었다. 후반엔 여전히 촉촉한 눈빛을 보여주며 괜히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자극적인 장면 때문에 유명해진 영화이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탄탄한 내용에 배우들의 연기 또한 뛰어나서 좋았다.

 

영화 색, 계(Lust, Caution,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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