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라진 시간(Me and Me, 2019)

시골의 작은 학교에서 초등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 김수혁과 그의 아내 윤이영은 젊은 사람답지 않게 번화한 읍내에 살기보다는 마을 내에 있는 외딴 집에 사는 것에 만족했다. 서로를 너무나 아끼고 사랑하는 그들에게는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기 때문이다. 그 비밀 때문에 서울에서 오랜만에 친구네 가족들이 놀러 와도 거짓말을 둘러대서 자고 가지 못하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김수혁이 가르치는 아이의 아버지인 정해균이 밤에 선생 부부네 집에 뭘 가져다주려고 들렀다가 이상한 소리를 듣는다. 정해균이 뭔가를 들었다는 걸 알게 된 김수혁은 어쩔 수 없이 부부의 비밀을 털어놓으며 다른 사람들에게는 말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지만, 모두가 친구이고 식구인 작은 마을에서 소문이 퍼지지 않을 리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 얘기를 듣고 처음엔 믿기 어려워했지만 나중엔 부부가 위협이 된다고 멋대로 판단하고선 밤에는 집 바깥에 자물쇠를 채운다.

평소처럼 밤에 자물쇠를 채운 날, 하필이면 누전으로 불이 나는 바람에 집은 몽땅 타버리고 김수혁 부부는 안에 갇혀 질식으로 사망했다. 형사 박형구는 갇힌 부부와 마을 사람들 사이에 뭔가 비밀이 있다는 걸 예감하고 수사를 시작한다.

이하 결말 스포일러 및 개인적인 생각을 포함하고 있음

김수혁 부부의 말 못 할 비밀은 아내 윤이영에게 있었다. 밤이 되면 누군가가 그녀의 몸에 들어와 그 사람 행세를 했는데 아침이 되면 윤이영은 그걸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빙의 증상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었다. 윤이영에게 들어오는 혼은 죽은 사람들이었다. 처음엔 남편 어머니의 혼이 들어와 아들을 향한 애틋한 마음을 드러냈고, 이후엔 작고한 유명 코미디언과 프로레슬링 선수의 혼이 들어오기도 했다.
윤이영은 낮에만 자기 자신으로 살 수 있었다. 밤이 되면 기억도 하지 못하는 날들이 이어졌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살 수 없었고, 그 때문에 김수혁은 시골 마을 선생님으로 생활하는 길을 택했다. 현대 의학으로 어찌할 수 없는 윤이영의 병으로 인해 시골에 살 수밖에 없는 김수혁은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이 컸기 때문에 현재에 만족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김수혁도 자기 자신으로 살지 못한다는 점은 윤이영과 큰 차이가 없는 듯 보였다. 자신에겐 선택지가 있으나 아내에겐 없기 때문에 그녀를 위한 결정을 한 셈이니 말이다.

그렇게 부부 두 사람이 행복한 날들만 보냈으면 좋았겠지만, 밤에 어떤 혼이 들어오느냐에 따라 김수혁의 행동도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바깥에서 엿들은 정해균은 그들이 제정신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게 당연했다. 밤에는 다른 사람이 되지만 윤이영이 여전히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이 다른 사람들은 믿기 어렵고 받아들이기도 힘든 문제였다. 자신 스스로를 증명할 수 없는 상황에 현재를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뿐이었는데 안타깝게도 비극이 일어났다.

영화 초반은 이렇게 비현실적인 상황에 놓인 부부와 그들 모습에 마을 사람들의 단합된 행동을 보여줬는데, 사고가 일어난 후 형사 박형구가 등장하면서 상황은 다르게 바뀌었다. 박형구가 수사를 하는 점은 별다를 게 없었다. 누전에 의한 질식사지만 바깥에서 잠겨있던 자물쇠에 의문점을 느껴 마을 사람들과 학교 교장 등을 찾아간다. 박형구는 정해균을 포함한 마을 사람들 모두에게서 윤이영의 증상에 대해 듣게 되는데 그건 직접 보지 않는 이상 믿기 어려운 것이었다.

수사에 더 이상 진척이 없을 때쯤, 어쩌다가 마을 사람들 모임에 끌려가 거하게 술을 얻어 마신 뒤에 박형구의 상황이 완전히 바뀌면서 영화는 또 다른 국면을 맞이했다. 아내, 두 아들과 아파트에서 사는 형사 박형구가 아닌 시골 마을 외딴 집에서 윤이영의 병세를 가지고 혼자 살아가는 학교 선생 박형구가 되고 만 것이었다. 믿을 수 없는 현실에 가족들과 살던 집에 찾아가 보고 아들의 학적을 조회해보지만, 그 어디에서도 형사 박형구의 삶을 찾을 수가 없었다. 지독한 악몽이라는 생각이 들어 꿈에서 깨기 위해 온갖 행동을 벌이기도 하지만 이 현실이 결코 꿈이 아니라는 사실만 깨닫는다. 박형구는 윤이영처럼 자기 자신을 증명할 길이 없게 된 셈이었다.

영화에서 보여준 몽환적인 표현보다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면, 인생이 어느 순간 뒤틀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삶이 나의 삶이 맞는지 의문이 드는 순간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살아온 시간들을 떠올려봐도 딱 꼬집어 어떤 시기마다 인생이 바뀌었다고 느껴지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아마 모든 사람에게 그런 순간이 있지 않을까 싶다.
박형구에게 그 시기는 마을 사람들 모임에서 얻어 마시게 된 송로주였다. 뜨개질 선생으로 등장한 초희가 초반엔 윤이영, 후반엔 박형구와 인연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녀의 인생이 바뀐 시기는 핸드폰 번호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초반부터 후반까지 내내 등장하며 눈길을 끌었던 정해균 아들이 사물함에 숨겨둔 가족사진을 보며 그 아이 역시 뭔가 달라진 게 아닐까 싶었다. 어린애답지 않은 말투에서 그런 느낌이 들기도 했고, 확실하진 않지만 박형구의 인생이 바뀌기 이전에 비슷한 외모의 여성을 봤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든 것 같다. 그리고 온천에서 짧게 등장한 두 남녀의 대화를 통해 그들이 김수혁, 윤이영과 연관이 있다는 느낌도 받았다.

그렇게 이전과 완전히 달라진 삶을 처음엔 거부하며 되찾기 위해 애를 쓰지만 이내 받아들이게 된다. 영화에서만 볼 수 있는 과장된 설정으로 한 사람을 완전히 다른 삶에 떨어뜨려놓았지만, 평범한 삶에서도 한순간에 인생이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망해서 집에 빨간 딱지가 붙기도 하고 누군가는 로또에 당첨되어 갑작스러운 부를 누리며 사는 것, 그것이 영화에서 말하는 완전히 달라진 인생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작년에 김윤석 배우가 감독으로 데뷔해 호평을 받았기에 정진영 배우가 이 영화로 감독 데뷔를 했다고 해서 궁금했다. 스포일러가 없는 시사회 후기를 대충 훑어봤었는데 호불호가 갈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뭔가 딱 규정지을 수 없고 머리를 쓰게 만드는 내용일 것 같아서 영화를 보게 됐다.

초반엔 로맨스 같았다가 스릴러 같기도 했고, 박형구의 삶이 바뀐 이후에는 미스터리 장르로 변했다. 그 사이에 코믹한 부분도 있어서 얼마나 웃었는지 모르겠다.(그 장면에서 아무도 안 웃고 나만 웃긴 했지만…) 그리고 후반에는 영화의 내용을 되짚어보며 곰곰이 생각하게 만들었다.
신선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장르를 하나로만 이야기할 수 없다는 점이나 현실에 대입할 수 있는 과장된 영화적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이 그랬다. 배배 꼬아놓은 매듭을 풀기 위해 따라가는 과정이 흥미로웠고 결말이 완전히 달라지거나 꿈이라는 떡밥을 물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걸로 끝나서 더 좋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극과 극으로 갈릴 타입의 영화라 좋은 반응은 별로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꼬아놓은 내용을 좋아하거나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에겐 이 영화가 괜찮을 것 같다.

영화 사라진 시간(Me and Me, 2019)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Scroll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