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밤쉘: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Bombshell, 2019)

폭스뉴스의 간판 앵커 메긴 켈리는 대선후보 토론회에서 도널드 트럼프와의 설전으로 그의 트위터에서 공격 대상이 되었다. 그녀가 여자라는 것을 문제 삼아 비방을 서슴지 않으며 할 말, 못 할 말을 구분하지 못하고 트럼프가 글을 써재끼는 바람에 메긴의 주변이 시끄러워져 예민해진다.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케일라 포스피실은 잘나가는 선배 메긴과 그레천을 능가하는 앵커가 되고 싶다. 그녀는 상사에게 잘 보인 덕분에 시청률이 높은 프로그램으로 옮길 수 있었고, 더 나아가 폭스뉴스의 회장 로저 에일스와 독대하게 된다. 하지만 로저의 방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그녀는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비밀을 떠안게 된다.

인기 있는 앵커였다가 이제는 좌천된 그레천 칼슨은 자신의 앞날을 내다보기라도 한 듯 변호사를 만나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시한폭탄을 손에 쥐고 기다린 그녀는 로저로부터 갑작스럽게 해고를 당하자, 그가 자신을 성추행했다는 폭로를 한다.

2017년 영화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의 미투 운동보다 1년 앞선 2016년 일어난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였다. 미국 최고의 보수 언론이라는 폭스뉴스의 앵커 그레천 칼슨과 메긴 켈리가 회장 로저 에일스를 상대로 한 성추행 소송이었다. 두 사람은 실제 인물이고 마고 로비가 맡은 햇병아리 직원 케일라는 가상의 캐릭터라고 한다.

영화는 가장 잘나가는 메긴이 폭스뉴스에 대해 설명하는 장면으로 시작되었다. 실질적인 소유주는 루퍼트 머독 일가지만 로저 에일스가 회장직을 맡아 쥐락펴락하고 있어서 폭스뉴스의 권력은 그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폭스뉴스는 로저가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공간인 셈이었다.
그는 뉴스도 시각적 영향이 있는 매체라는 논리로 여성 앵커들에게 무릎 위로 올라오는 짧은 치마를 입으라고 강요해 다리가 보이는 전신샷으로 뉴스 화면을 잡도록 했다. 더 높이 올라가길 바라는 여자 직원과 만나는 자리에서는 몸매를 품평하듯 더러운 눈길로 훑어보는 건 당연한 얘기였다. 이런 인간의 특징은 도무지 정도가 없다는 게 문제라 자신의 권력을 무기로 상대방이 힘겹게 올라온 자리를 위협하며 야욕을 드러냈다.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 이 모양이니 아랫물이 맑을 리가 없었다. 어느 정도 권력을 손에 쥐게 되면 오로지 욕구를 채울 생각밖에 하지 않는 것 같았다.

폭스뉴스가 보수적 성향이 짙어서 직원들 또한 회사가 좋아하지 않을 일, 반대되는 모든 문제를 드러낼 수 없다는 걸 이후에 보여줬다. 케일라에게 조언을 해주다가 가까워진 제스는 자신이 어떤 곳에서 일하고 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개인적인 성향이나 정치색을 숨기려 애를 썼다. 로저의 성추행 기사가 터진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해고되는 바람에 더 이상 폭스뉴스와 엮일 게 없던 그레천이 앞장서서 폭로를 하며 뒤이어 따를 사람들을 기다렸지만 또 다른 피해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로저는 좋은 상사라는 이야기와 그의 미담들만 쏟아져 나올 뿐이었다.
회사에 남아있는 사람들이 왜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는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로저가 현재의 폭스뉴스를 만들었다고 할 정도로 언론계에서 알아주는 인물이기 때문에 함부로 반대편에 가서 설 수 없었다. 먹여살릴 가족이 있거나 회사가 잘못돼 해고되기라도 하면 갈 데가 없고 또다시 일을 구하는 현실적인 문제도 있어서 어쩔 수 없었다.

머리로는 이해하겠는데 마음은 도무지 그걸 따를 수 없었다. 특히나 중반 이후 회사에서 일하는 젊은 여자 직원들에게 다가가 무슨 말이라도 했다간 큰일이 날 거라는 뉘앙스로 눈에서 레이저를 쏘는 중년 여성은 로저만큼이나 나쁘게 보였다. 같은 성별이라고, 똑같이 성추행을 당했다 해도 모두가 연대를 가지는 건 아니었다. 로저를 옹호하고 그레천을 비난하는 여자들의 심리는 대체 뭐였을지 납득을 할 수가 없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어느 정도의 야망은 가질 수 있기 때문에 누군가가 그랬던 것처럼 받아들이거나 혹은 거부하고 비밀로 하며 넘어갈 수는 있겠지만, 공론화된 사건은 같은 여자로서 분노해야 마땅한 일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싶다.
내게는 성추행 사건이 로저 개인의 문제이지 회사의 문제는 아니라고 느껴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회장이라는 중요한 인물이 추한 짓을 저질렀다는 오명 때문에 회사의 이미지가 실추될 수는 있겠지만 충분히 회복할 수 있는 것이었다. 오히려 그렇게 큰 스캔들을 감추려고 했다는 사실이 나중에 밝혀진다면 그게 더 나쁜 이미지로 남지 않았을까 싶다.

성추행 스캔들이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하며 막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깨진 바가지에서 새어 나온 물은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스며 들어 세상에 알려진다. 이 사건에 대해 잘 몰랐고 영화를 보기 전에 일부러 검색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혹여 고구마를 줄까 걱정했었는데 다행히 진실이 밝혀졌다. 용기 있는 그레천이 앞장을 서서 이끌어줘서 사실이 알려지고 이제는 세상이 바뀌어야 한다는 걸 자각한 사람과 유명한 그레천만큼 힘이 없어 주저하던 여성들이 목소리를 보탠 덕분이었다.
결말에 히든카드가 터졌을 때 뭐 씹은 얼굴이 되던 로저의 표정을 보며 정말이지 너무나 통쾌했다. 비장의 무기를 마지막까지 숨겨둔 그녀에게 기립 박수를 치고 싶었다.

영화 초반에 샤를리즈 테론이 등장해 이런저런 설명을 하고 니콜 키드먼도 화면 너머의 관객에게 말을 하는 장면들이 왠지 익숙했는데, 알고 보니 <빅쇼트>의 각본가가 썼다고 한다.(근데 왜 필모그래피에는 없지?)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고 배경이 뉴스 채널이라 그런지 이런 구성에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짧은 러닝타임에 세 여성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전개가 힘 있게 펼쳐져서 영화 내내 집중해서 볼 수 있었다.

실제 인물을 연기한 샤를리즈 테론과 니콜 키드먼의 관록 있는 연기가 정말 좋았다. 사건의 중심에 있지만 서로 다른 상황 속에서 지켜보고 판단하는 두 캐릭터의 대비가 돋보였다. 그녀들과 달리 아직 사회 경험이 많지 않은 마고 로비의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 왠지 마음이 쓰였다. 후반에 케일라가 울 때 괜히 눈물이 났을 만큼 그녀의 심경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멋진 세 배우가 출연하는데 그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건 딱 한 번뿐이라 그 부분이 좀 아쉽다.

영화를 보면서 20대 초중반에 내가 일을 하면서 겪고 본 것들이 떠올랐다. 영화에서 피해를 입은 여성들처럼 심각한 정도까진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건 분명히 언어적인 성추행이었는데 말이다. 같이 일하던 여자 선배도 갑자기 그만두고선 이유는 말해주지 않고 나에게 누구를 조심하라고 얘기했던 기억도 떠오른다. 그때는 왜 그런 게 잘못된 행동이라고 인지하지 못했을까 싶다. 어리고 사회에 대해 잘 몰라서 그리고 당연해서 그런 일을 겪는 게 아니라, 그런 짓을 하는 인간들이 있기 때문에 겪지 않아도 될 더러운 피해를 입는 것뿐이었다.
영화 속 누군가가 그랬던 것처럼 피해자들이 자신 탓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영화 밤쉘: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Bombshell, 2019)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Scroll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