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반도(Peninsula, 2020)

대한민국에 좀비 바이러스가 퍼져 사람들은 안전하다고 소문난 부산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곳 역시 이미 폐허가 되어 안전한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그렇게 4년이 흐른 뒤, 대한민국은 세계가 외면하는 고립무원 상태가 됐다.

4년 전, 정석은 누나와 매형, 그리고 조카를 데리고 한국을 빠져나가는 마지막 배에 올랐었다. 하지만 배에서도 좀비가 나타나는 바람에 누나와 조카를 잃고 살아남은 매형과 홍콩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각자 살아가던 중 오랜만에 매형과 한자리에 마주하게 된 건 누군가의 제안 때문이었다. 한국에 있으나 마나 한 달러가 가득 들어있는 트럭을 홍콩으로 가지고 온다면 한 사람당 250만 불을 주겠다고 했다.
홍콩에서 무시를 당하고 사느니 목숨을 걸고 다시 돌아가 돈만 얼른 가지고 오기로 결정한 정석과 매형, 그리고 다른 두 사람은 배를 타고 인천항으로 향한다.

제 목숨이 위협받는 상황이 되면 사람들은 인간성을 잃어버리기 마련이었다. 장교인 정석이 누나 가족과 함께 한국을 빠져나가는 길에 민정과 어린 딸을 마주하지만, 그는 멀쩡해 보이더라도 낯선 사람들보다는 피가 섞인 가족을 택했다. 마음이 쓰여도 어쩔 수 없이 누나와 매형, 조카와 함께 무사히 배에 오르지만, 존재를 몰랐던 좀비의 출연으로 누나와 조카를 잃어 그의 곁에는 매형만 남았다. 누나와 결혼한 사람이지만 어떻게 보면 남이라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매형마저 가족이 아니라고 치부하면 정석이 심적으로 의지할 데가 없기 때문에 매형과의 인연을 놓지 못하는 듯했다.
가족이라고 하기에도 뭐하고 그렇다고 모르는 사람이라고 할 수도 없는 매형과 다시 한국으로 오게 되면서 함께 온 일행이 각자도생하자는 말을 했다. 좀비가 득시글거리는 이곳에서 다른 사람의 목숨까지 위험하게 만들지 말라는 뜻이었다. 평범한 상황이었다면 그런 말을 하는 사람에게 뭐라고 했을 테지만, 반도는 지옥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자잘한 인연 따위에 연연할 수 없었다. 그 무엇보다 자신의 목숨이 가장 소중한 것이었다.

이 상황은 영화 중반 이후 완전히 뒤집히는 모습을 보였다. 매형과 처남은 남이고, 민정과 딸 유진이 가족처럼 함께 지내는 준이와 김 노인 역시 남인데 앞서 등장한 사람들의 관계와는 전혀 달랐다. 누군가를 도와주다 주변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지 말라는 것과 완전한 타인을 위해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것은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인간미의 유무였다.
홍콩으로 탈출한 그들도 어쩌면 반도에서 함께 도와주다 살아남았더라면 가족 이상의 끈끈한 연대로 인해 따뜻한 인간미를 가질 수도 있었을 것 같다. 위험한 상황에서의 인간미가 때론 더욱 빛나기도 하니 말이다.

이들과는 또 다른 무리가 631 부대였다. 혼돈만 있는 반도 내에서 군인 노릇을 하는 무법자인 그들은 함께 먹고 자고 생활했는데 연대라거나 인간미 따위가 전혀 없었다. 서로를 군인 계급으로 부르며 나름의 위계를 잡아놨지만, 언제든 상대의 뒤통수를 칠 생각을 하고 있었고 대장 노릇을 하는 서 대위는 당연히 위치에 어울리지 않는 인간이었다. 이들이야말로 각자도생을 하고 있었다.
민정 일행과 631 부대가 같은 반도에 있었어도 이렇게 다른 것은 본성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빼앗고 훔치고 죽이고 자극적인 것을 추구하는 본성을 가진 사람들은 631 부대가 입맛에 맞았고, 어린아이들을 보호하고 엄마와 할아버지를 걱정하는 아이들처럼 인간미가 있는 사람에게 631 부대는 좀비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영화의 도입부터 정석이 누나 가족과 탈출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신파에 시동을 걸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김없이 가족, 그것도 핏줄이 섞인 사람만 죽이는 걸 보며 이 영화의 코드를 읽을 수 있었다. 이후 민정과 딸 유진, 딸은 아니지만 민정을 엄마라고 부르는 준이와 사단장이라 불리는 김 노인 등 피만 안 섞였을 뿐 가족인, 선한 사람들이 등장해 결말에 어떤 장면을 보여줄지 예상을 할 수 있었고 그게 적중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얘기였다. 그 부분에서 좀 불만인 것은 특정 캐릭터가 사망 플래그를 띄운 것 말고는 딱히 뭘 보여준 게 없었다. 알고 보니 큰일을 하긴 했지만 별개의 문제로 보였기 때문에 이 캐릭터를 이렇게 사용하려고 만든 건가 싶었다.
그래도 영화에서 보여주지 않은 그들만의 가족애가 있었기 때문에 그 캐릭터를 신파로 활용하는 데 큰 무리가 없다고 너그럽게 생각할 수 있었으나, 정석이 매형을 향한 감정은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하기 어려웠다. 홍콩으로 넘어간 후에 살갑게 의지하며 지낸 것도 아니고, 피 한 방울도 안 섞인 매형이 누나를 죽은 마누라라고 칭하며 막말을 하는데 나 같았으면 진작 인연을 끊고도 남았을 것 같다. 그래서인지 탈출 직전 매형과의 특정 장면은 억지스러워 보였다. 매형 캐릭터 역시 631 부대의 악행과 그 장면을 위해 존재한 것이기도 했다.

이들 외에 악역 위치에 있던 631 부대도 등장할 때는 돋보이긴 했지만 활용도 면에서는 별로였다. 631 부대는 폐허가 된 대한민국의 악한 무장 세력인데 숨바꼭질이라는 이름의 게임을 제외하면 그렇게 악당들이라고 느껴지진 않았다. 길에 있는 식품 트럭을 가져다가 자기들끼리 먹는 걸 나쁘다고 할 수는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황 중사와 서 대위는 악인 캐릭터라 잠깐 인상적이었을 뿐, 좀비가 쏟아져 내리는 장면과 폭풍 후진 장면을 위해 살려둔 거라고 해도 무방했다.
정석이나 민정 역시 돋보이는 캐릭터라고 할 수도 없었다. 민정은 특히 내가 정말 끔찍해마지않는 마지막 신파를 위해 남아있는 캐릭터였다. 그리고 정석은 주인공이지만 딱히 인상적이진 않았다.
유일하게 가장 좋았던 캐릭터는 준이었다. 좀비들을 차로 들이받으며 등장해 카레이서 저리 가라 싶은 운전 실력을 보여주는데 얼마나 멋있었는지 모르겠다. 무표정으로 일관하며 운전해서 그런가 더 매력 있었다.

티저 예고편을 봤을 땐 기대감이 조금 있었으나 메인 예고편을 보고서는 영 내 스타일이 아닐 거라 짐작했는데 역시나 아니었다. 많이 아니었다. 내용이 너무 없었다. 뺏고 빼앗는 트럭이 영화 내용의 전부였다. 그러고선 갑작스레 해피엔딩인데 낌새가 있었다고는 해도 이건 아닌 것 같다. 민간인 몇 명을 위해 그들이 온다는 게 설득력이 부족하지 않나 싶다.
내용은 이 모양이었어도 특별관에서 봤기 때문에 액션과 카 체이싱이 등장할 때는 신나긴 했다. 우당탕탕 신나게 들이받고 빠르게 운전하고 총도 마구 쏴주는 효과를 그대로 느껴서 지루하진 않았다. 하지만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를 오마주 혹은 패러디 아니면 그냥 베낀 장면이 좀 묘해서 논란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포스트 아포칼립스에 좀비 액션, 미친 사람들과 선한 사람들, 그리고 신파까지(!!!) 다 담았지만 내겐 기대한 게 없어서 남은 것도 없는 영화다.

 

영화 반도(Peninsula,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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