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무스탕: 랄리의 여름(Mustang, 2015)

 

 

터키 어느 해안가의 작은 마을에 생기 넘치는 다섯 자매가 살고 있었다. 좋아하는 남자아이와 한창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첫째 소냐, 조용하지만 자매들의 든든한 기둥 같은 존재인 둘째 셀마, 장난기 많은 셋째 에체, 착하고 다정한 누르와 장난꾸러기 막내지만 정이 깊은 랄리까지 자매들은 서로에게 가장 가까운 친구 사이라 언제나 함께 어울리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날씨가 좋아서 학교가 끝난 후 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가던 다섯 자매는 같은 학교 남자아이들과 바다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남자아이의 어깨에 목말을 타고 놀았고, 바다에서 나온 후에는 근처 과수원의 사과를 따먹기도 했다. 그러고선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온 자매들을 할머니가 한 명씩 방에 끌고 들어가 무언가를 확인했다. 이웃 아주머니가 자매들이 남자아이들과 바닷가에서 놀던 모습을 보고 할머니에게 여자의 행실을 운운하며 일러바친 것이었다.
그날 이후로 자매들은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

 

 

10대 초반에서 후반까지의 연령대인 자매들은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부터 할머니 집에서 살고 있었다. 친척이긴 해도 다른 사람의 집에서 더부살이를 하고 있는 입장이라 눈치가 보일 법도 했지만, 자매들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의지가 되는 듯했다. 친구 같은 사이였으니 더욱 그럴 만했다. 그래서 할머니가 남자아이의 목에 올라탔다며 순결을 운운하는 구시대적인 사고방식으로 자매들에게 뭐라고 할 때 다 같이 소리 높여 자기주장을 말할 수 있었다.
이 장면을 보며 문득 영화의 시대적 배경이 언제인지 궁금해졌다. 확실히 알 수는 없었지만 그리 먼 과거는 아닌 것 같았는데, 조금 지나고 나서 삼성 핸드폰이 등장한 걸 보며 적어도 2000년대 초반은 된 것 같아서 경악했다. 21세기에 조선 시대 여자처럼 살라고 강요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심지어 자매들이 진짜로 뭘 한 게 아니라 고작 목말을 탔다고 방에서 확인하고 병원에까지 데려가는 걸 보며 앞으로 영화가 어떤 방향으로 진행될지 조금은 예상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가슴이 답답해졌다.
할머니도 할머니지만 문제는 삼촌이 훨씬 더 고지식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할머니가 뒤이어 일어난 사건들을 삼촌이 모르게 무마하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걸 보며 만약 삼촌에게 걸렸다면 어떻게 됐을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아무튼 바닷가 사건 이후로 자매들은 탈선을 부추길만한 물건들과 옷을 모두 빼앗겼고 학교에도 가지 못하고 홈스쿨링을 하게 되는데, 그 홈스쿨링은 다름 아닌 신부 수업이었다. 음식을 만들고 이불 솜을 누비는 것까지 배우는 걸 보며 꿈이 있고 원하는 게 있는 한 사람이 아니라 오로지 결혼을 하기 위해 태어난 여자라고만 여기는 것 같아서 정말 불쾌했다. 그것도 모자라 구세대의 상징이라 여기는 듯한 일명 “똥색 옷”을 맞춰 입고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을 남자들에게 자매들을 선보이는 건 반항할 의지마저 꺾어버리려는 것이었다. 자매들에겐 남자와 결혼하는 것 외에 다른 인생은 존재하지 않으니 꿈도 꾸지 말라고 말이다.

할머니와 삼촌을 비롯해 다른 친척들이 구속한다고 해도 세상을 향해 나가고자 하는 그녀들을 꺾을 수는 없었다. 감시가 느슨할 때 몰래 도망치고 창문을 통해서도 드나들며 가고 싶은 곳에 가고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났다. 하지만 번번이 들키게 되면서 요새와 같던 집은 점점 감옥으로 변해갔다.

 

 

이하 결말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음

그래도 그때까진 괜찮았으나 자매들의 결혼이 진행되면서부터는 갑갑하기만 했다. 집으로 초대된 사람들에게 자매들을 선보이고 자신의 아들과 잘 어울릴 것 같은, 혹은 그저 마음에 드는 아이를 골랐다. 남자나 여자나 결혼을 하는 당사자에게는 좋고 싫다는 의견 자체를 묻지 않았고, 오로지 어른의 허락이 떨어지면 붉은 끈이 달린 반지를 나눠끼는 의식으로 결혼을 약속했다. 그러고선 일사천리로 결혼 준비를 하는데 어찌나 식은 죽 먹기였는지 결혼이 이렇게 쉽다는 걸 처음 알았다.
다섯 자매 중 큰 아이 둘이 먼저 결혼을 하게 되는데, 다행히 첫째 소냐는 사랑하는 남자한테 얼른 청혼을 하라고 언질을 준 할머니 덕분에 그와 결혼할 수 있었으나 셀마는 마음에 들지도 않는 사람과 결혼을 하게 됐다. 그러고선 원치도 않았던 첫날밤을 보낸 이후 침대 시트를 확인하자고 문을 두드리는 신랑 측 부모의 행태도 모자라 병원까지 가는 걸 보며 자꾸만 혈압이 올랐다.

이런 언니들을 본 막내 랄리는 언제가 될지 모를 때를 준비했다. 큰 언니와 둘째 언니를 그렇게 쉽게 결혼시켜버렸으니 아직은 어려도 자신의 차례가 머지않았다는 걸 깨달은 탓이었다. 그 과정에서 랄리는 이전에 도망쳤을 때 도움을 받았었던 트럭 운전사 야신과 가까워지면서 집안 어른들 누구도 가르쳐주려고 하지 않았을 운전까지 배웠다. 그리고 영화 초반 장면을 통해 랄리에게는 언니들만큼이나 의지가 되는 사람이 있다는 걸 보여줬기에 탈출만 하면 어떻게든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첫째와 둘째를 쉽게 보내고 난 후에는 셋째 에체의 차례가 되자 내내 밝고 장난기 넘치던 그녀가 예고도 없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어 어찌나 놀랐는지 모른다. 오죽 싫었으면 그렇게 갑자기 허망한 선택을 했을까 안타까웠다. 이 정도가 되면 집안 어른들이 깨닫고 반성할 줄 알았다. 아직 어리긴 해도 아이들에게는 인격이 있고 앞으로 어떤 인생을 살아갈지 정하는 것 역시 본인들의 선택에 달린 거라고, 소 잃고 외양간이라도 고칠 줄 알았다.
그러나 내 생각이 순진하다고 비웃는 듯, 잠깐의 슬픔이 끝나고 곧바로 누르 차례가 돌아왔다. 갱생의 여지가 없는 삼촌과 할머니였기에 홀로 꿋꿋하게 준비를 하던 랄리는 다시금 원치 않은 결혼을 하게 될 마지막으로 남은 언니를 구하기 위해 행동력을 보였다. 이 과정이 얼마나 긴장됐는지 모른다. 진짜 잡히면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리고 머리털도 빡빡 밀어버릴 것 같은 삼촌을 피해서 과연 달아날 수 있을지, 감옥 같은 집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한껏 긴장하면서 봤다. 스릴러 저리 가라 싶을 만큼 아슬아슬한 추격전이었다.

남녀가 똑같이 동등한 인격체라는 걸 인정하지 않는 가정에서 이뤄낸 성취이기에 랄리의 선견지명이 더욱 빛났다.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한 소냐, 랄리 덕분에 감옥 같던 집에서 얼떨결에 도망칠 수 있었던 누르, 스스로 인생을 개척한 랄리, 그리고 원치 않은 결혼을 한 셀마 모두 행복했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다.

 

 

어떤 나라에서는 아직까지 여성이 인생을 쟁취하는 게 이렇게 힘들다는 걸 알게 됐다. 자신의 인생을 타인이 정해주는 대로 따라야만 하는 그 강압적인 분위기가 숨이 막혔다. 랄리처럼 자신의 인생을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 당연하다는 듯 비난이 돌아오는 게 이해가 되질 않았고, 벗어날 수 없다는 걸 뼈저리게 알고 있기에 끔찍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애처로웠다.
대체 왜 여성에게만 이렇게 억압을 하고 구속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순결과 정절을 그토록 부르짖는 남성들에게 본인은 얼마나 순결한지 말해보라고 하고 싶다. 상대방에게 순결을 강요할 거라면 본인도 순결해야 되는 게 당연한 이치였다. 이슬람은 아무리 봐도 인간 사회 전반을 퇴행시키는 시대착오적인 종교라는 생각이 든다. 여성 인권에는 물론이고 타 종교에까지 부정적인 영향을 미쳐서 죄 없는 사람들을 고통받게 하니 말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내용 때문에 너무나 화가 나고 욕이 입안에 자꾸만 맴돌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밝은 여름 햇살과 청량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거기다 맑고 예쁜 다섯 소녀가 주인공이라 초반엔 청춘 영화를 보는 듯 기분이 맑아지는 듯했다. 5분 만에 그 맑은 기운은 사라져버렸지만, 그랬기 때문에 소녀들이 처한 환경이 더 비극적이라고 느껴졌다. 칙칙한 어둠 속에서 닿을 수 없는 햇살을 바라는 소녀들의 간절함을 나 역시 깊이 바랐다.

다섯 소녀들 중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이 영화에서 처음 연기를 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지지고 볶다가 결국엔 서로뿐인 실제 자매처럼 보이는 연기를 리얼하게 소화해냈다. 각자의 성격에 걸맞은 캐스팅 역시 탁월했다. 그중에서 강인한 의지를 가진 막내 랄리가 정말 인상적이었다. 기어코 해내고야 말겠다는 눈빛이 기억에 남는다.

 

영화 무스탕: 랄리의 여름(Mustang,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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