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리드(Greed, 2020)

패션계에서 자수성가한 걸로 유명한 “몬다”의 CEO 리차드 맥크리디는 자신의 60번째 생일 파티를 위해 그리스 섬의 호텔을 통째로 빌렸다. 그것뿐만 아니라 생일 파티 콘셉트인 로마 제국에 걸맞게 축소된 원형 경기장을 짓는 건 물론이고, 로마 검투사 “글래디에이터”를 흉내 내고 싶어서 사자까지 공수해 왔다. 이름만 대면 누군지 다 아는 배우, 가수, 모델 등의 셀러브리티를 초대했고, 파티를 어떻게든 화려하게 만들고 싶어서 셀럽 대역까지 준비시켜뒀다.

그런데 파티가 이제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는데 진척이 더디다. 미니 원형 경기장 윤곽만 겨우 잡혔는데 다른 문제가 생겼고, 사나워야 할 사자는 큰 고양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기운이 없다. 그런가 하면 초대한 셀럽들은 왠지 시간에 맞춰 오지 않을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이런 와중에 리차드의 자식들과 전처 사만다까지 누구 하나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영화 초반엔 생일 파티가 열리기 5일 전의 그리스 미코노스 섬에서의 준비 과정, 리차드의 자서전을 쓰는 작가 닉이 사람들을 인터뷰하는 다큐멘터리 느낌의 장면, 그리고 청문회 비슷한 자리에서 자신의 사업에 대해 질타에 가까운 말을 듣는 리차드의 모습이 그려졌다.
세 시점을 오가며 진행되는 장면을 통해 리차드가 어릴 때부터 이제 막 사회인이 된 이후, 나이 든 현재까지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가 어떤 캐릭터인지 단번에 알 수 있게 했다. “탐욕왕 맥크리디”라는 별명에 정말이지 딱 들어맞는 사람이었다. 사립학교에 다니던 10대 시절에 친구들을 속여먹는 것에서부터 시작된 협상 재능은 비슷한 크기의 욕망을 가진 어머니 덕분에 사그라들지 않았고, 사회인이 되어 패션계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날개를 달고 하늘 높이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가 상위 1%의 억만장자가 될 수 있었던 건 자기 것은 최소한으로 내놓고, 남의 것은 최대한 빼앗아오는 데에 있었다. 그가 협상을 하는 방식은 혀를 내두를 만해서 저렇게까지 하면서 돈을 벌어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까지 들게 만들었다. 그만큼 지독했고, 있는 놈이 더 하다는 말에 적합한 사람이었다.

이런 그가 자신의 60번째 생일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투자를 했다. 오션뷰가 너무나 아름다운 그리스 섬의 호텔을 통째로 빌린 것은 어마어마한 사치나 마찬가지였다. 리차드는 이 파티를 통해 자신의 부를 과시하고 싶었던 것 같았다. 패션계에서 워낙 악명이 높아 매스컴에 자주 오르내리기 때문에 이번 생일 파티도 당연히 관심을 받을 거라 예상했다. 그래서 특별하게 준비하고 싶었고, 또 자랑을 하고 싶기도 했다.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젊은 사람 못지않게 남의 관심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파티를 완벽하게 만들고 싶었지만 그건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왜냐하면 본인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불평, 불만으로 입만 떠들었기 때문이다. 리차드 때문에 고생하는 건 비서와 경기장 건설 책임자, 호텔 관련 책임자 아만다였고, 심지어 자서전 작가 닉은 리차드의 생일 축하 영상을 위해 다른 나라에까지 다녀와야 했다. 갑이 시키니까 을, 병, 정 등은 입 닫고 해야만 하는 상황이 참으로 눈물겨웠다. 이런 일까지 해야 하나 싶은 생각은 후반으로 갈수록 더 많이 들었고, 갑보다는 을(이하?)의 위치가 공감되어 그들에게 감정이입이 됐다.

중반까지는 리차드의 파티 진행이나 과거 회상을 통해 웃음을 주는 장면이 더러 있었다. 리차드가 말할 땐 대체로 불만이 가득한 모습으로 상대방에게 쏴붙이는 장면의 연속이었는데, 욕을 정말 찰지고 얄밉게 잘했다. 욕을 먹는 사람들에게 공감이 되면서도 욕설에 감탄하는 기이한 감정이 들었다. 이 와중에 가장 좋았고 통쾌했던 장면은 리차드가 전처 사만다를 비꼬는데 그녀가 맞받아치는 대사였다. 내가 을의 입장에서 그 자리에 있었다면 사만다에게 더 해달라고 속으로 응원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제일 빵 터진 장면!)
그리고 리차드의 딸이 남자친구(역할)와 리얼리티 쇼를 촬영하는 장면은 세상 사람들이 보는 리얼리티 방송이 사실은 다 짜인 각본이라는 걸 비꼬고 있어서 웃겼다.

이하 간접적인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음

영화 초반부터 리차드가 사업을 경영할 때 어디에 기준을 두는지 충분히 보여줬었다. 시작은 가벼웠지만 나름대로 그만의 방식이라 여겨졌다. 모든 사업의 기준은 금전적 가치가 우선이었으니 리차드의 행동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하지만 영화가 중반 이후에서 후반으로 흘러가면서 불편한 감정이 점점 커졌다. 리차드가 사업하는 방식은 가진 자가 더 많이 가지게 하는 것이었고, 반대로 가지지 못한 자는 그나마 가지고 있던 것조차 빼앗겨 더욱 벼랑 끝으로 내몰리게 하는 것이었다. 리차드의 입장에서는 돈이 돈을 벌었고, 그의 사업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은 티끌 모아 티끌이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특히나 리차드가 사업을 위해 협상을 할 때는 무조건 깎으려고만 하며 화까지 냈었는데, 자신의 생일 파티를 위해 가수들을 초대할 땐 몇 십만에서 백만 달러 가까이 지불하는 걸 보니 왠지 모를 허무함까지 느꼈다.
물론 리차드가 쓰는 돈은 자신이 벌어들인 것이긴 하지만, 그가 이룩한 상위 1%의 제국을 위해 일한 99%의 사람들은 제대로 된 노동력조차 보장되지 않았기 때문에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과거는 물론 현재까지 리차드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의 노동력의 가치는 바닥을 기는 수준이고, 리차드의 안하무인은 너무나 불쾌했기 때문에 그를 좋게 볼 수 없는 건 당연했다.

중반 이후 화려함의 이면이 밟고 있던 땀과 눈물이 드러나면서 파티는 시작되었지만, 영화의 분위기가 신나지만은 않았다. 이곳저곳에 심어져 있던 전조가 때가 되기만을 기다리는 것 같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뭐가 있을 것 같던 한 사람의 행동이 발화가 되어 여러 사람을 거쳐 마침내 큰 사건에 다다랐다. 급발진이나 다름없던 사건이라 충격을 받았다. 영화 초반의 분위기를 뒤집는 결말이라 얼마나 놀랐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보통은 영화에서 해당 장면을 보면 드는 감정이 대체로 비슷한데 이 영화에서는 그 감정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저 인과응보라는 생각만 들었다. 본인이 뿌린 게 있으니 그렇게 거둬지는 법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영화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리차드의 막내아들 핀과 그리스 섬에서 리차드의 생일 파티를 위해 일한 아만다는 똑같은 일을 겪었지만, 핀의 삶은 그대로 혹은 더 높은 곳을 향해 가고 아만다는 열악하게 바뀌었기 때문에 씁쓸한 뒷맛이 남았다.
핀을 보며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속담이 떠올랐다.(나쁘고 대단한 놈..)

코미디 내지는 블랙코미디인 줄 알았는데, 실은 팩트 폭행을 세게 날리는 영화였다. OEM 방식으로 운영하는 사업체 중 리차드처럼 경영하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었다. 물론 정직하게 노동의 대가를 지불하고 세금도 꼬박꼬박 잘 내며 사회에 환원까지 하는 존경할만한 사업가도 있겠지만 소수일 테고, 아마 대부분은 제 배를 불리기에 급급할 것이다. 관련 법안이 있기는 하나 리차드가 그랬던 것처럼 강제성을 띠지는 않는 듯해서 해결하기 힘든 문제일 것 같다.
리차드 같은 사업가는 제발 정신 좀 차리고 정직하게 경영했으면 좋겠다.(안타깝게도 그럴 리 없겠지만.)

후반으로 가면서 영화가 심각해지고 실제로 문제가 되는 이슈를 보여주긴 했지만, 중반까지는 눈이 즐거웠다. 그리스 섬이 주요 무대라서 푸른 하늘과 바다의 아름다운 풍경을 마음껏 만끽했다. 오랜만에 영화로나마 멋진 자연을 감상해서 좋았다.
영화 후반에 리차드의 생일 축하 영상 속 진짜 유명인들의 등장도 인상적이었다. 총 5명 중 4명은 얼굴을 알아봤는데, 대역이 아닌 진짜 그분들 본인이라 깜짝 놀랐고 또 반가웠다.

예상과는 다른 전개와 결말에 충격을 받긴 했는데 이렇게라도 영화를 통해 관련 이슈를 환기시켜서 무언가 조금이라도 바뀌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영화 그리드(Greed,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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